李載祥
載祥1909. 5. 13 ~ 1982. 1.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민족혁명당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909년 5월 13일 경기도 개성부(開城府) 경정(京町, 현 개성시 관훈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이초생(李初生)·이동정(李同汀)·아키타 유타카(秋田豊)를 사용하였다. 어려서 한문을 배웠고, 1921년 송도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 3월 졸업하였다. 같은 해 4월 서울로 올라와 중동학교 별과에 입학하였으나, 1927년 친형이 사망함에 따라 학업을 중단하고 형 대신 대동운송점을 경영하였다. 1929년 11월 회사를 처분한 돈을 소지하고 학업을 목적으로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갔다. 도쿄전기치료소(東京電氣治療所)에 들어가 1930년 3월 졸업하고 귀국하여 개성에서 동아전료원(東亞電療院)을 개업하였다. 실적이 부진하여 같은 해 8월 폐업하고, 이전 도쿄전기치료소 재학 시 알게 된 중국인 천모(陳某)의 알선으로 취업을 목적으로 11월 중국 다롄(大連)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갔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병원의 전기치료기기 기사로 채용되어 일하던 중, 1932년 1월 ‘상하이사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2월부터 상하이시국요원회가 주관하는 양곡 운반부로 일하였다. 얼마 후에는 일본군 부대 통역으로 근무하다가 상하이사변이 끝나자 일시 귀국하였다. 인삼 150근을 갖고 4월 중순 다시 상하이로 건너가, 이학수라는 인물과 인삼장사를 시작하였다. 1933년 3월경부터 상하이와 오사카(大阪)를 왕복하며 잡화상을 하던 중, 같은 해 8월 밀수입, 탈세로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에 기소되어 징역 7월,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1934년 2월 초순경 상하이에서 오사카로 건너가 일본인 무역회사에 근무하다가 8월 사직하였다. 사업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평양 출신 조모(趙某)와 공동으로 마약류를 밀매하던 중에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서에 붙잡혀 벌금형을 받았다. 이후 사업관계로 고소당하자 홍콩으로 탈출하였다. 홍콩에서 1년여 동안 인삼판매업을 하는 한인상점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중국 각지를 전전하며 사업을 하였다. 1937년 6월말 난징(南京)에서 임득산(林得山)이 경영하는 가게에서 근무하는 처 김수경(金壽卿)을 만나러 난징에 도착하여, 동서(同壻)인 중국 헌병 중위 장흥(張興, 일명 張基鎭) 집에 머물렀다. 1937년 12월 한커우(漢口)에서 윤기섭(尹琦燮)을 ‘보증인’, 문일민(文逸民)을 ‘소개인’으로 하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입당하였다. 3·1운동 기념행사, 안창호(安昌浩) 추도회 등을 비롯하여 민족혁명당 중경구당부 월례회, 소조회(小組會) 등의 회합에 출석하였다. 1938년 4월 19일 민족혁명당 당원과 중국인을 합하여 약 250명이 모여 안창호 추도회를 개최하였다. 이철(李哲)·이춘암(李春岩), 중국인 장보륜(張伯倫) 등이 안창호의 약력과 인격 등을 회고하며 조국 광복을 위하여 활동 한 투사로서의 경력을 예찬하고, 고인의 유지를 계승하여 조선 독립의 실현에 매진하자는 요지의 연설이 있었다. 끝으로 ‘조선독립만세’ ‘중화민국만세’를 삼창하고 해산하였다. 5월 1일 노동절에는 충칭시(重慶市) 정부가 주최하는 관민합동의 항일 민중대회가 거행되었다. 5만여 명의 군중이 참가한 가운데, 각 단체 깃발을 선두로 ‘타도 일본’을 의미하는 구호를 적은 대소 깃발을 흔들며 군중대회가 진행되었다. 이때 이춘암·이철·윤기섭·김홍서(金弘敍)·이집중(李集中)·문일민 등의 민족혁명당 당원을 비롯한 그 가족들과 함께 행사에 참가하였다. 이춘암은 ‘한인 대표’로 항일연설을 하였다. 또한 손아래 동서인 장흥이 광시(廣西)·구이저우(貴州) 방면의 중·일 전선으로 배속됨에 따라, 창사(長沙)에 있는 장흥의 가족이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돕는 등 1938년 6월까지 민족혁명당 활동에 참여하였다. 1938년 7월 상하이를 경유하여 난징으로 가서, ‘아키타 유타카(秋田豊)’라는 일본인 이름으로 신분을 숨겨 난징 주둔 일본군 부대의 통역으로 근무하던 중 붙잡혀 1939년 10월 경기도경찰부로 압송되었다. 1939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41년 풀려난 후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광복 후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상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