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元大
元大1911. 12. 29 ~ 1943. 6. 1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의열단
- · 민족혁명당
- · 조선의용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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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77) 1911년 12월 29일 경상북도 신녕군(新寧郡) 지곡면(知谷面) 오산동(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에서 부친 이중호(李重鎬)와 모친 정오동(鄭梧桐)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대(源大)이나, 호적에는 원대(元大)로 기록되어 있다. 자는 달문(達文), 호는 덕산(德山)이다. 이명으로 공문덕(孔文德)·마덕산(馬德山)을 사용하였다. 한학자이자 부농인 부친 덕분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6, 7세부터 한문을 배웠고, 10세부터 신학문을 접하기 시작하였다. 1927년 12월 자천리에 사는 정진형(鄭鎭瀅)의 딸 호삼(胡三)과 결혼하였다. 1928년 3월 자천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보통학교 재학 시절 ‘저항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 ‘백의민족의 귀머거리’를 자처하며 일제에 저항한 백농(白聾) 조재만(曺再萬) 등과 교유하였다. 보통학교 졸업 후 영천 지역 유일의 중등 교육기관인 영천농업보습학교(현, 영천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29년 졸업한 뒤에는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기까지 여러 곳을 전전하며 방황하였다고 한다. 1933년 9월 초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며칠 뒤 이진영과 함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일명 조선의열단간부학교) 입학을 목적으로 난징(南京)으로 이동하였다.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안병철의 권유 때문이다. 안병철은 매형인 이육사(李陸史)·이원대 등과 백학학원(白鶴學院)의 동기생이었고,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이육사와 함께 2년여 동안 옥고를 치르고 고향으로 돌아온 조재만(曺再萬)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다. 안병철은 이육사·조재만 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김원봉(金元鳳)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학하여 졸업 후, 2기생 모집 임무를 띠고 상하이를 거쳐 1933년 7월 하순경 오산리로 돌아와 대원을 모집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 의열단 본부가 있는 난징성 내 류예가(柳葉街) 56호에서 김원봉을 면담하고, 이진영과 함께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1주일 정도 지나 이진영과 함께 2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입교할 때 ‘공문덕(孔文德)’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엄격한 규율과 강도 높은 교육을 통해 항일독립군 간부로서 자질을 갖추어 가던 중,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洛陽分校 韓人特別班)으로 편입되었다. 낙양분교에서는 ‘마덕산(馬德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한인특별반은 김구가 장제스(蔣介石)의 지원에 힘입어 독자적으로 운영한 군사간부 양성기관으로, 정식 명칭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였다. 주로 동북군을 양성하는 낙양분교에는 당시 제16대까지 편제되어 있었고, 제17대는 한인 청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특별히 편제된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 갈등으로 인해 한인특별반의 독자적인 교육이 중지되었고, 한인 입교생들은 제1대에서 제16대까지 중국 학생 대대에 몇 명씩 분산 수용되어 교육을 받게 되었다. 1년여의 간부 훈련과정을 마치고 1935년 4월 9일 졸업하였다. 졸업한 후 김승곤, 이진영 등 김원봉 계열의 동기생들과 함께 4월 중순경 난징으로 이동하여 ‘군정부학병대(軍政府學兵隊)’란 명칭으로 난징성 중화문 밖에서 일시 대기하였다. 이곳에서 의열단으로서 지하공작 활동을 전개하면서 대일 항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1935년 7월 5일 난징 진링(金陵)대학에서 민족혁명당이 정식으로 발족하자 의열단계 낙양분교 졸업생들과 함께 입당하여 민족혁명당 난징구(南京區) 당부(黨部)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민족혁명당 대원이 된 후에는 동료인 김승곤(金勝坤, 일명 黃民)과 함께 한 조를 이루어 특파 공작원으로서 2년여 동안 난징과 상하이 등에서 정탐 활동, 일본 관리 암살 및 시설파괴 공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김원봉은 중국 정부 수뇌부와 한중 합작에 의한 항일 연합전선을 펼 것을 협의하고, 한인 청년들을 다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훈련시켜 실전에 배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2월 1일 장시성(江西省) 싱쯔현(星子縣)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星子分校) 특별훈련반 제4중대’에 입교하였다. 성자분교는 원래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에서 중국공산당을 토벌하기 위해 설립한 유격훈련 기관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항일 역량을 증대시키려는 목적으로 예비역 장교의 재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성자분교에 입교한 지 채 한 달이 안 되어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는 등 전세가 중국 측에 불리하게 전개되자, 한인 입교생들은 후베이성 장링(江陵)으로 옮겨 6개월 과정의 훈련을 마치고 1938년 5월 24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다른 동료 대원들과 함께 김홍일(金弘壹) 교관 인솔하에 조선민족전선 본부가 있는 한커우(漢口)에 도착하여 전략적 요충지대인 무한삼진(武漢三鎭)을 수호하는 데 필요한 선전공작과 간첩 체포, 포로 심문, 시설파괴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설될 때, 제1구대로 편성되었다. 조선의용대가 창설된 지 보름만인 10월 25일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우한(武漢)이 함락되자, 제1구대 전원은 박효삼 인솔하에 11월 중순경 후난성 핑장현(平江县) 메이시안진(梅仙镇)으로 이동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한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12월 초 일본이 창사(長沙) 침공을 개시하자 조선의용대 제1구대 대원들은 중국군을 지원하는 한편 방어전을 전개하면서 창사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중국군과 조선의용대는 초토항전과 적군의 전진 속도를 최대한 저지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우선 일본 기계화 부대의 침공을 막기 위해 도로를 여러 군데 끊고 후방에서는 철수작전을 벌여 일본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후퇴를 거듭하여 12월 하순경 일본군의 창사 입성이 임박하자 중국군은 초토항전 작전 일환으로 이 지역의 건물에 방화를 시작하였다. 이어서 항일군은 창사 근교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도로를 차단하는 등 전투태세를 갖추고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일본군은 창사에 입성하지 못하고 후퇴를 시작하였다. 중국군과 조선의용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격을 가하였다. ‘제1차 창사(長沙) 대회전(大會戰)’으로 불리는 이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일본군이 창사에서 퇴각한 후 동료 대원들과 제9전구 정치부를 도와 이재민들의 구호사업과 도시 복구사업에 참여하였다. 약 1개월간의 복구사업이 완료되자 조선의용대 제1구대는 1939년 1월 말 중국군 제9전구 예하 제31집단군 제92군 소속 제21사 121, 122연대와 제82사에 배속되었다. 이때 제21사 제122연대에 배속되어 무푸산맥(幕阜山脈)의 통청현(通城縣) 우통산(梧桐山) 진지에 배치되었다. 주로 대적 선무공작, 일본군 포로 심문, 유격전, 대적정보 수집 활동을 전개하였고, 통신시설과 교량 등을 폭파 공작에도 참여하였다. 1939년 말경 조선의용대는 편제를 대본부를 총대부로, 구대를 지대로 고치고, 3개 지대로 확대 개편하였다. 이때 기존의 제1구대 일부 인원과 일본군 귀순자를 포함한 신입대원을 합해 제3지대가 창립되었다. 제1구대 일부 대원들과 함께 제3지대에 편성되었다. 1939년 12월 초 제3지대가 제3전구 지역으로 파견되자, 대원들과 함께 800여 리 행군 끝에 장시성(江西省) 전선에 도착하여 대일 항전에 참전하였다. 중국군대와 공동으로 야간 습격에 참전하였으며, 적 진지와 100m도 안 되는 거리까지 접근하여 대적 선전활동을 전개하는 등 일본군의 심리를 교란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 적 후방 지역으로 침투하여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기도 하였다. 1940년에 접어들어 조선의용대는 그간 2년간의 활동에 대한 자체 점검을 통해 종래의 활동노선과 활동방식에 일대 전환을 꾀하고자 화북지역으로의 진출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제3지대 대원들과 함께 1941년 3월 초 뤄양(洛陽)으로 이동하여 1·2지대와 합류하여 황하(黃河)를 건널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였다. 조선의용대는 북상부대를 4개조로 재편하여 3월 하순부터 황하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이때 1·3지대 혼성 부대로 편성된 제1의 북상 지대에 편성되어 가장 먼저 황하를 건너 화북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수석 부대로 가장 먼저 황하를 건너 대원들과 함께 중국 국민당 군대 관할구인 린현(林縣) 일대에 들어가 주둔하였다. 이후 타이항산(太行山) 일대의 팔로군(八路軍) 작전지역에 머물면서 그들과 연대하며 대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주력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이름을 바꾸고, 지대부(支隊附)와 1·2·3대로 재편되었다. 제3대에 편성되어 산시성(山西省)과 허베이성(河北省) 일대를 무대로 한 대일 전투에 참전하였다. 1941년 10월 이래 스쟈장(石家庄) 지역에 잠입하여 대원 모집 활동을 벌이던 중, 1942년 5월 2일 일본군에게 붙잡혀 일본헌병대로 끌고가 조사를 시작하였다. 조사를 위해 통역관으로 들어온 자가 뜻밖에도 1941년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함께 활동한 유빈(劉斌)이란 자로 본명은 신용순이었다. 유빈은 일본군 특무기관에 소속된 인물로 일종의 첩보원이었다. 그는 이원대의 활동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왜곡된 통역으로 곤경에 빠트리기까지 하였다. 베이징의 헌병대 본부로 이송되어, 군사정탐죄라는 이유로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고, 1943년 6월 17일 일본군 헌병대 본부 후원에서 14명의 저격수에게 총살되었다.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 눈을 가리기를 거부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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