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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형

尹致衡

1893. 9. 10 ~ 1970.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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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윤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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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密陽)의열투쟁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밀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일합사
  • · 의열단
  • · 밀양청년회
  • · 신간회 밀양지회
  • · 밀양협동조합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 · 밀양 폭탄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3년 9월 10일 경상남도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성내(城內) 노하(路下)골(현 경남 밀양시 내이동)에서 아버지 윤희선(尹熺璿)과 어머니 서흥(瑞興) 김씨(金氏) 사이의 6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무송(茂松)이고, 1931년 중국 재망명 후에 김시화(金時化)·윤추암(尹推岩)을 이명으로 썼다. 1911년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구마모토(熊本)고등학교와 구마모토현립공업학교(熊本縣立工業學校)에서 수학·졸업하였다. 귀국 후 황상규(黃尙奎)·김대지(金大地)·구영필(具榮珌) 등이 1913년경 밀양에서 친목단체로 위장하여 결성한 항일단체 일합사(一合社)에 가담하여 이수택(李壽澤, 일명 이일몽[李一夢])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9년 1월에 사망한 고종의 장례에 참례키 위해 족제(族弟)인 윤세주(尹世胄)를 대동하고 서울에 갔다가 3월 1일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시위 현장을 목격하고 당일자 『조선독립신문』을 받아서 귀향하였다. 그 상황을 선배지사 전홍표(全鴻杓)에게 보고하여 지도받고, 밀양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하여 김병환(金鉼煥)·정동찬(丁銅燦) 등 10여 명의 동지들을 규합하고 거사를 준비하였다. 3월 12일 저녁에 내일동 김병환의 집에 모여서 숙의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써넣은 대형 깃발 1개와 소형 태극기 수십 개 및 경고문을 쓰고 만들어서 보관시키고, 『조선독립신문』을 조카뻘인 밀양소년단장 윤태선(尹泰善, 일명 윤차암[尹且岩])에게 교부하였다. 13일 오후 1시경 밀양장터 앞에서 윤세주와 함께 만세시위를 지휘하고 2천여 군중을 이끌어 행진토록 하였다. 헌병대가 급거 출동하여 시위대를 난타 진압하고 연행하기 시작하자 윤세주와 함께 재빨리 도피·은신하여 붙잡히지 않았다. 같은 해 4월 14일 부산지법 밀양지청의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 6월이 선고되었다. 1919년 7월경 윤세주와 함께 만주 지린(吉林)으로 망명하여 황상규·김대지·이일몽과 재회하고, ‘육탄혈전’의 국내거사를 위한 청년결사대 조직이 추진되고 있다 함에 고향의 친형에게 연락하여 4천원을 송금받았다. 그 돈을 펑톈(奉天)의 구영필에게 보내면서 2천원으로 닝안현(寧安縣) 닝쿠타(寧古塔)의 토지를 매수하고 2천원은 독립운동에 써 달라 하였는데, 그 중 3백원이 11월 10일 의열단 창단 직후 폭탄 구입차 상하이(上海)로 가는 단장 김원봉(金元鳳)과 단원 이성우(李成宇)에게 여비로 지급되었다. 의열단의 제1차 국내 적기관 총공격 거사가 추진되기 시작하자 1920년 3월경 부산으로 들어와 은신 대기하였고, 5월 19일 동지 배중세(裵重世)로부터 2차 밀반입 폭탄 13개가 창원군 동면 무점리(武店里)의 인척 집에 은닉시켰음을 고지받았다. 그리고 폭탄 관리책인 이수택으로부터 거사 실행 담당자 사기진작용 지원금 1천원 제공을 요청받고 승낙하였는데, 6월 중순부터 밀입국 단원들이 대거 붙잡히면서 거사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 약속은 이행되지 못한 것 같다. 일제 경찰의 검거망이 펼쳐진 가운데 뜻밖에 나타난 구영필의 제의와 요구대로 8월 8일부터 동래군 구포(龜浦)의 김재수(金在洙) 집에 은신해 있으면서 구영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 8월 9일 경기도경찰부 순사의 급습을 받아 붙잡혔다. 7개월간의 경찰 조사와 검사국 예심을 거쳐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1년 6월 21일 이른바 폭발물취체벌칙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고 마포의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6년 4월에 만기 출옥하고 귀향한 후 1927년 4월 밀양청년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고, 같은 해 12월 신간회(新幹會) 밀양지회가 창립될 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신간회 밀양지회 재정부 간사, 본부대회 출석대표, 경남도지회 연합발기준비대표위원회 홍보담당 등을 역임하고 1930년 지회 집행위원으로 재선임되었다. 1928년 2월 신간회 지회 주도로 로치데일(Rochdale) 방식의 협동조합이 결성될 때 참여하였고, 1929년 4월 9일 서울 광화문통(光化門通)에서 열린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 집행위원회에 정헌태(鄭憲台) 등 다른 5명의 위원과 함께 참석하였다. 신간회 해체 후인 1931년 8월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다시 망명하였고, 1934년 닝쿠타로 갔다가 1937년 8월 다시 베이징으로 이주하여 동서패루(東西牌樓) 다복항용(多福巷用)에 거주하였다. 1939년경 작성된 일제 관헌문서에 “민족주의가 농후한 자로 조선 독립에 관계하여 항상 과격한 언동을 하고 타인을 사주·선동할 우려가 있음. 최근 중남(中南) 중국의 불온조선인 김원봉 일파와 내통하고 있다는 설도 있어 주의 중”으로 적기(摘記)되었다. 1942년경 ‘조선의용군 조직책임자’인 윤세주와 연락한다는 이유로 베이징 일본영사관 경찰서에 1개월, 헌병대에 2개월 구금되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45년 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경남 의령군단(宜寧郡團) 단장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의령군 지부장으로 선출되었고, 1949년 9월부터 1950년 4월까지 의령군수로 재임하였다. 1960년 민주당 의령군당 위원장으로서 제5대 국회의 경상남도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공직 은퇴 후 말년에는 부산 서구에서 거주하다 1970년 11월 16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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