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康壽
康壽1866. 2. 15 ~ 1925. 3. 1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이강년 의병부대
- · 유인석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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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3) 1866년 (음)2월 15일 경상북도 문경군(聞慶郡) 가은읍(加恩邑) 죽문리(竹門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문경에서도 1896년 (음)1월 11일 종형(從兄) 이강년(李康秊)이 산포수 10여 명을 모은 뒤 가은읍 도태리(道胎里) 도태장터에서 군중들을 의병으로 확보하고 왕능리(汪陵里) 왕능장터에서 300여 명 규모의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부대에 필요한 경비로 먼저 전 재산과 경지를 정리하여 군자금 200냥을 마련해 내어 놓았으며 의병부대의 소모장(召募將)으로 종군하였다. 같은 해 (음)1월 13일 안동(安東)에서 일어난 의병을 피해 달아나던 안동부(安東府) 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호위 순검들을 붙잡아 농암면(籠巖面) 농암장터에서 목을 베어 군중에게 경고하였다. 충북 충주(忠州)에 주둔하고 있는 호좌 의병부대의 지원을 얻고자 유인석(柳麟錫)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유인석은 군사를 지원해 주겠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이에 이강년은 군사 500명을 이끌고 문경군 마성면(麻城面) 모곡(矛谷)에서 지원군을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었다. 모곡 주둔이 여의치 않자 마성면 신현리(新峴里) 석현산성(石峴山城)의 마고성(麻姑城)으로 들어가 기다렸다. 그런데 (음)1월 15일 갑자기 관군이 습격해 오자, 이에 항거해 혈전을 벌였으나 막아내지 못하고 대패하였다. 이강년과 함께 1896년 (음)1월 29일 제천의 유인석을 찾아가 사제(師弟)의 의(義)를 맺고, 그 휘하의 유격장(遊擊將)과 우군장(右軍將)에 올랐다. 이후 고모성(姑母城) 수안보(水安堡)와 조령(鳥嶺) 일대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군장비의 열세로 (음)3월 8일 제천(堤川)으로 물러났다. 제천에서는 선유사(宣諭使) 직함을 띤 경병 장기렴(張基濂)과 누차 항쟁을 하였다. 하지만 형세가 불리하여 제천 의병부대는 만주로 이동하였고, 이강년은 문경으로 돌아와 그해 (음)7월 28일 뒷날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산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이에 반대하여 의병들이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강년도 1907년 3월 충북 제천에서 일어나자 함께 일어나 경북 문경·충북 제천·단양, 강원도 원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항쟁을 펼쳤다. 특히 1907년 7월 제천전투에서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경북·충북·강원 일대에서 계속 활약하였다. 이강년을 따라 문경지역과 봉화(奉化)지역의 전투 등을 거치며 활약하였다. 하지만 1908년 7월 2일 제천(堤川) 작성(鵲城)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이강년이 체포되어 사형을 받게 되면서 의병부대는 해산되었다. 이강년의 큰아들 승재(承宰)와 함께 동지 사우(師友)들에게 이별을 알리는 유서를 전해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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