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麟錫
錫1842. 1. 27 ~ 1915. 1. 2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제천의병
- · 화서학파
- · 십삼도의군
- · 성명회
포상 정보
- · 대통령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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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장(1962) 1842년 1월 27일 강원도 춘천군(春川郡, 현 춘천시) 남면(南面) 가정리(柯亭里)에서 아버지 유중곤(柳重坤)과 어머니 고령 신씨(申氏)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이다. 1855년 2월 14살 때 족숙(族叔) 유중선(柳重善)의 양자가 되어 경기도 가평군(加平郡) 설악면(雪岳面) 자잠(自潛, 현 사룡리 자잠마을)으로 이주하였다. 양가(養家)의 증조부 유영오(柳榮五)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와 일찍이 교분을 맺었기 때문에 입양된 시점부터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화서학파 학문의 핵심인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위정척사와 존화양이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하였다.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조치로 만동묘(萬東廟)가 철폐되자 이를 비판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이항로가 유림의 대변자로서 조정의 부름을 받자 함께 상경하여 활동하였다. 1868년 이항로가 사망하자,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과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지도를 받았다. 1871년 충북 괴산군(槐山郡) 화양동(華陽洞)의 만동묘를 참배하였고, 1874년 스승 유중교와 함께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朝宗面) 대보리(大報里) 조종암 대통단(朝宗巖 大統廟)을 방문하여 위정척사사상을 강화하였다. 1875년 운요호사건으로 정부에서 개항과 반개항을 놓고 논의가 발생하자, 1876년 1월 유림들과 상경하여 “금일 강화는 비단 국가의 존망이 결판나는 일일뿐만 아니라 사도와 인류가 멸절되느냐 마느냐하는 중대한 일”이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리며 개항에 반대하였다. 1877년 유중교의 지시로 가평군 외서면(外西面) 화야산(禾也山) 운곡암에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읽으며 학문을 닦았고, 이후 개화 풍조를 반대하면서 만동묘를 참배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883년에는 스승 유중교와 설악산에서 공부하였고, 1884년 춘천군 남면 가정리로 이주하였다. 1893년 제천군(堤川郡) 장담리(長潭里, 현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장담마을)으로 이주하여 강학하였고, 스승 유중교가 별세하자 춘천 가정리 유중교의 강단에서 강회를 하였다. 1894년 6월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갑오개혁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고자 하였지만 주변의 호응이 없어 실패하였다. 1895년 1월 갑오개혁의 조치 중 하나인 변복령에 반대하였고, 같은 해 5월 충북 제천군 장담리 굴탄(屈坦, 현 봉양읍 구곡리)으로 이주하여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강회를 실시하였다. 그 해 8월 을미사변에 이은 단발령 소식을 듣고 이에 대처할 방안을 논의하며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원수를 소탕하는 거의소청(擧義掃淸), 해외로 망명하여 중화 문화를 지키는 거지수구(去之守舊), 대도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정치명(自靖致命)을 내용으로 하는 ‘처변삼사론’을 선비가 행해야 할 3가지 방향으로 제시하였다. 처음에는 중국 망명을 생각했지만 안승우(安承禹)를 비롯한 문인들의 만류로 같은 해 11월 의병활동을 시작하여 대장 이필희(李弼熙), 중군 이춘영(李春永), 선봉 김백선(金伯先), 군사 서상렬(徐相烈), 군무도사 안승우를 지휘부로 의병부대를 구성하였다. 의병부대가 구성되자 제천군 인근에서 군사를 모집하였고 이필희와 차후 계획을 논의하며 서북에는 강한 포군이 모여있고 동남에는 인재와 곡식이 있기 때문에 원주(原州)와 제천 사이에 근거를 두고 서북에서는 군사를 모집하고 동남에서는 인재를 모집하자고 제안하였다. 이후 단양(丹陽)으로 의병부대를 이동시켜 관군과의 장회촌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전투 이후 지역 문인들이 의병장에 오를 것을 청하자 모친상 중이며 선비이기 때문에 병사를 지휘할 능력이 없다고 거부하였으나, 성리학적 대도를 보존해야한다는 제자들의 권유로 의병장이 되었다. 1896년 2월 영월(寧越)에서 호좌의병부대를 결성하고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 전통문화를 지킬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의병장 취임 즉시 전국에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를 권하였다. 당시 의병의 지휘부는 창의대장 유인석, 중군장 이춘영, 전군장 안승우, 후군장 신지수(申芝秀), 선봉장 김백선이었다. 그 해 2월 11일 호좌의병부대는 영월에서 제천으로 이동하였으나 제천의 방비 태세가 견고하자 충주(忠州)로 진격하였다. 그러면서 의병에 비협조적이었던 단양군수와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처단하여 대의명분을 확고히 세웠다. 1896년 2월 15일에는 충주성을 완전히 장악하고 충주성 남문을 통해 달아나던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일제의 앞잡이라는 명분으로 처형하고 인근의 개화파 군수들을 처단하면서 반외세 항쟁을 전개하였다. 호좌의병부대가 충주를 점령하자 춘천에서 의병 활동을 하던 이소응(李昭應)이 합류하면서 「군중사무대강(軍中事務大綱)」을 작성하여 의병부대의 체제를 구체화하였다. 이 시기 중앙에서는 아관파천의 단행으로 친일내각이 붕괴하였고 전국적으로 의병들의 해산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같은 날 일본군이 달천(達川)을 건너 충주를 공격했지만 중군장 이춘영이 패퇴시켰고, 수안보(水安堡)에서도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춘영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1896년 2월 29일 일본군은 병력을 확충한 후 이틀에 걸쳐 충주성을 공격하였고 성내로의 물자 지원이 차단되자 의병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같은 해 3월 2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대포를 빼앗기고 주용규(朱庸奎)를 비롯한 6인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같은 달 5일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나 식량과 탄약 부족으로 더 이상의 항전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음을 틈타 충주성을 빠져나갔다. 같은 달 8일 청풍을 거쳐 제천으로 돌아와서 병력을 재정비하였다. 이때 문경(聞慶)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이 합세하자 유격장으로 임명하여 호좌의병부대의 전력을 강화시켰다. 의병부대를 정비하고 일본군의 병참기지가 있는 가흥(可興, 현 충주시 중앙탑면)과 수안보를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1896년 3월 15일 의병부대를 이끌고 수안보를 공격하였지만 일본군의 방비가 철저하자 후퇴하였고, 같은 달 18일 가흥을 재차 공격하였지만 패배하였다. 그 해 4월 25일 친위대(親衛隊) 참령 장기렴(張基濂)이 4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충주에 도착하여 왕의 관리를 죽이고 국가의 재물을 빼앗는 것은 의병이 아니라며 의병해산을 종용하는 글을 보냈다. 그러자 국모의 원수를 갚고 존왕양이의 의리를 펼치는 것은 대원칙이고, 의병들이 살해한 관리는 국가의 관리가 아닌 난적이며, 왜적과 역적을 토벌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하지만 같은 해 5월 23일 친위대 병력의 공격을 받아 안승우 등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고 단양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단양에서 수산으로 이동하였고 의병부대 패배에 책임을 지고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중화의 명맥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위의 만류로 의병활동을 재개하였다. 일단 패배한 의병부대를 추스르면서 1단계 여주(驪州), 2단계 강원도, 3단계 서북지방, 4단계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구원병 요청, 5단계 중국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국내로 진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여주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심상희(沈相禧)가 의병부대를 해산하여 여주를 포기하고 강원도로 의병을 이끌고 이동하였지만 친위대 장기렴의 추격을 받았다. 1896년 7월 관군의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받으면서도 서북지역으로 이동하여 같은 해 8월 평안도 운산(雲山)에서 관군을 상대로 승리했고, 같은 달 24일 압록강 초산(楚山)에 도착하였다. 초산 아이진(阿吏鎭)에서 「재격백관문(再檄百官文)」을 통해 의병항쟁의 정당성과 춘추대의의 필요성을 발표하여 국경을 넘는 것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나라의 원수를 갚고 예를 회복하기 위함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1896년 8월 28일 240여 명의 호좌의병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갔으나, 다음날인 29일 청나라 관리 서본우(徐本愚)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고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강을 건넌 240명 중 219명의 의병이 귀국하였고, 유홍석(柳弘錫, 유인석의 종형)을 비롯한 21명이 남아 서본우가 지정해 준 환런현(桓仁縣) 호로두구(湖蘆頭溝)에 머물렀다. 호로두구는 산으로 둘러싸여 의병의 근거지로써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지만, 인적 기반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기에는 곤란함이 있었다. 이에 위안스카이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관련 인사들과 함께 선양(瀋陽)으로 이동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임오군란 때부터 갑오개혁까지 한국에 머물며 위정척사정책을 후원했기 때문에 군사 지원을 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일본과의 외교문제를 이유로 군사적 지원이 아닌 군자금으로 은자 30냥을 지원받았다. 중국의 지원이 여의치 않자 의병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한인 이주민이 있는 퉁화현(通化縣) 오도구(五道溝)로 이동하였다. 퉁화현에 의병 재기를 위한 근거지를 마련하고 농사와 가축 사육을 통해 식량을 비축하고자 하였다. 또한 「여동문사우서(與同門士友書)」를 작성하여 의병에 합류할 것을 호소하였다. 1896년 9월에는 서상무 등에게 귀국하라는 칙명을 받았다.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칙유를 받지 않으면 임금을 저버리는 것이고 이는 군신의 인륜을 없애는 것이니 귀국할 필요가 있다며 자신의 정당함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귀국하였다. 이후 동북지역에 기거하며 향후 계획을 세워 나라가 회복되지 않으면 차라리 평생 랴오둥(遼東)에 머무르겠다고 다짐하고 다시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1898년 2월 출발하여 그 해 4월에 랴오둥에 이르렀고 같은 해 6월 퉁화현 오도구에 도착하였다. 2차 망명 때는 1차와 달리 유인석의 문인과 그 가족 등 50~60여 명과 함께 이동하여 의복과 상투를 지키며 우리 민족의 문물을 유지하는 일에 치중하였다. 같은 해 11월 오도구 팔왕동(八王洞)으로 이동하여 의병근거지를 조성하였고, 1899년 근처의 용산촌(龍山村)으로 이동하였다. 이 지역에서 향약을 실시하고 한인 이주민들에게 충효사상을 교육시켜 후진을 양성하고 ‘소중화 예의지국’을 부흥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면서도 고조선부터 한국의 덕학, 명절, 충신, 효자, 열사에 관한 사실들을 모은 국사책인 『동국풍화록(東國風化錄)』, 시국 문제를 이야기한 『국병설(國病設)』 등 저술 활동을 벌이며 국내외 반일투쟁을 촉구하였다.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 주변 환경이 험악해지자 산으로 피산하였고 같은 해 8월 귀국하였다. 귀국하면서 중국에서의 활동 전말을 상세히 적어 고종에게 보내 반역의 혐의를 벗었고, 그 해 12월 화서학파의 중심지인 충북 제천과 황해도 평산 등지를 돌면서 중화를 보존하는 일에 힘쓰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러면서 평안도에 거처를 정하고,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강회활동을 하며 주자학의 저항 논리를 되짚고 중화 문물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01년 5월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강학 활동을 이어갔다. 서북지역은 기자(箕子)의 고향이라는 명분과 이항로의 문인들이 다수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거지로써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평안도에서 활동하면서 새롭게 건물을 짓고 유교 성현을 모시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와 함께 호좌의병의 활동, 화서학파와 위정척사운동의 전모, 존화양이론의 성격, 유인석이 작성한 격문과 편지 등이 수록된 『소의신편』을 간행하였다. 일제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일진회를 중심으로 횡포를 부리자, 서북지역 유림을 대상으로 향약과 계를 실시하여 향촌사회의 결속을 강화하여 시국안정을 도모하였다. 1904년 10월에는 평산(平山)에서 제자 원용정(元容正) 등에게 향약을 조직하도록 지시하고 경기도 포천으로 이동하여 최익현(崔益鉉)을 만나, 전국 단위의 향약을 제안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제천에서 이소응 등에 의해 향약이 실시되었고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많이 가담하였다. 향약과 함께 의병활동의 인적 기반 마련을 위해 계를 실시하여 관서 지방을 중심으로 호남까지 영역을 확대시키고 전국적으로 넓히고자 계획하였다. 그러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방안을 담은 「칠실분담(漆室憤談)」을 지어 개화 정책이 초래한 위기를 지적하고 국왕과 집권층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자고 주장하였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의병을 일으키기가 어렵다고 판단되자 수의(守義)로 방향을 바꿔 향약을 실시하도록 추진하였다. 1905년 강원도와 충청도에서 제자들이 의병 봉기를 하자 이들을 후원하였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중화질서를 보존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이를 위해 강원도 화천군 곡운산에 유교 성현을 모시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강회를 열고 후학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였다.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국 각지의 관료와 유림들에게 일제를 내쫓을 것을 촉구하고 위안스카이에게 왜적 토벌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각지의 유림들이 의병을 일으키기를 촉구하자 1906년 4월 의병을 일으키기를 시도하였으나 건강 및 국내외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사의를 표하였다. 강원도 춘천 가정리로 돌아온 후 같은 해 6월 전국 각지에 편지를 보내 친일 정권이 추진하는 개혁을 비판하면서 중지할 것을 촉구하는 등 위정척사론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907년 3월 본격적인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였고 같은 해 7월 한성부(漢城府) 중부(中部) 교동(校洞,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일대)의 이용규(李容珪)와 밀사를 통해 뜻을 함께하기로 하였다. 일단 군사력 강화를 위해 해외로 가서 의병을 양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러시아로 가기 위해 함남 원산(元山)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낙마하여 부상을 당해 러시아로 가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908년 지속적인 의병활동을 위해 백두산을 근거지로 장기 항전을 해야 한다는 기본 방침을 작성하였다. 같은 해 5월 러시아로의 망명을 위해 60여 명의 문인들과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추석을 보내고 두만강 넘어 러시아, 중국과 국경이 접한 지역인 연추(煙秋, 현 크라스키노) 중별리(中別里)로 이주하여 연해주 의병이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할 때 군자금을 전달하였다. 그 해 11월 의병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지휘하기 위한 「의병규칙」을 제정하여 의병부대의 체계를 갖추고자 하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09년 1월 불화에 빠진 연해주 의병의 지도자 이범윤(李範允)과 최재형(崔在亨)의 화해를 주선하였지만 일이 성사되지 않자 거주지를 이전하여 별도의 대책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같은 해 4월 망국단과 망묘당을 쌓고 유교 성현과 스승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그 해 8월 국권을 회복하고 화맥을 보존하며 인종을 살리는 것을 목표로 한 「관일약(貫一約)」을 제시하며 의병 활동을 재개하고자 시도하였다. 같은 해 12월 의병을 통제하는 법을 마련하기 위해 「의병규칙」을 발전시킨 「의무유통(義務有統)」을 지었다. 1910년 5월 전국적 의병조직인 13도의군(十三道義軍) 도총재가 되었다. 13도의군은 중앙조직과 국내조직으로 구분되었고 중앙조직은 도총재(都總裁), 부총재, 창의총재, 도총재(道總裁), 도총령, 도참모, 도총무, 도소모, 도규찰, 도통신 등을 두고, 국내조직은 각 지역마다 총재, 총통, 참모, 총령, 소집, 규찰, 통신 등으로 구성되었다. 13도의군 결성식에서 국가를 보존하고 예를 되찾아야 함을 역설하였고, 국권을 회복하고 인류를 구하고 화맥을 보존하는 것이 의병봉기의 목적임을 밝히는 통문을 13도의군 의원들에게 보냈다. 같은 해 7월 28일 이상설(李相卨)과 연명으로 고종에게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영사관 파천과 군자금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러시아 지역에서 항일운동이 거세지자 일제는 외무대신을 파견하여 러시아 정부에 한국인의 항일운동에 대해 항의하였고 러시아 정부는 이후 배일운동을 단속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9월 러시아 당국의 탄압으로 13도의군 이범윤을 비롯한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13도의군이 해체되었다. 1911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탄압이 거세지자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산속에서 은거하였다. 가을이 되자 13도의군 간부들과 성명회(聲鳴會)를 중심으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수총재(首總裁)가 되었다. 하지만 권업회가 재러한인들의 러시아 귀화를 추진하자 의리로 보나 이해로 보나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일본과 관계를 맺은 러시아가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을 지속하자 중국 망명을 결심하고, 1913년 2월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우주문답』을 저술하였고 3월 노령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 마우카예프카(木花村)로 이주하였다. 1914년 3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시펑현(西豐縣)으로 이동하였고, 그해 5월 싱징현(興京縣) 난천자(暖泉子)에 정착하여 「도모편」을 작성하고 『우주문답』을 발간하였다. 같은 해 4월 김두운(金斗雲)을 베이징(北京)의 위안스카이에게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8월에 콴덴현(寬甸縣) 방취구(芳翠溝)로 옮긴 뒤 1915년 3월 74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1899년 문인 김화식 등에 의해 그동안 나온 항일의병 관련 글을 모아 문인사우들의 글과 함께 『소의신편(昭義新編)』이 간행되었고, 1902년에는 역시 같은 문인인 백삼규, 김형걸 등에 의해 『소의속편(昭義續編)』이 발간되었다. 사후에는 시문을 모은 문집 『의암집(毅菴集)』이 발간되었고, 2010년에는 제천문화원에서 『국역 의암집』을 출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김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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