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건중
尹建重1898. 8. 5 ~ 1987. 3. 2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8년 8월 5일 전라북도 전주군(全州郡) 삼례읍(參禮邑) 상례리(參禮里, 현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에서 아버지 윤원병(尹元炳)과 어머니 권일(權一)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소암(昭庵)이다. 1911년 전주 양성학교(養成學校, 현 전주완산초등학교)를 거쳐 1916년 군산 영명학교(永明學校, 현 군산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東京)의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에서 공부하였다. 귀국 후 1917년 전주의 서문교회(西門敎會) 집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탑골공원의 독립선언서 선포에 참여하고 이후 다시 전주로 내려와 기독교 세력과 함께 만세시위를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곧 독립선언문 등을 몰래 자전거 뼈대에 감추어 몰래 가지고 내려와 목사 김가전(金嘉全)과 최종삼(崔宗三)·이수연(李守淵)·김종곤(金鍾坤) 등 13명과 함께 전주에서 만세시위를 도모하여 3월 13일 이들과 함께 학생들을 규합하여 남문시장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정오경 남문의 인경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어 4월 초에는 함께 시위에 참여하였던 최종삼에게 지시하여 「내지동포(內地同胞)에게 고하는 글」과 『독립신문』을 전주군 전주면(全州面) 다가정(多佳町, 현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 박문재(朴文在)·문대근(文大根) 등 사람들에게 배포하도록 하여 만세시위 이후에도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 경찰로부터 전주 일대의 만세시위를 배후에서 조직하고 계획한 주도자로 지목되어 피신하였다. 피신해 있던 중에 조선총독부 참의원(參議院) 전라북도 대표로 행사에 참여한 친일파 김윤정(金潤晶)의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그가 재빨리 단상으로 뛰어내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일제의 수배를 피해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이승만(李承晩)·정환범(鄭桓範) 등과 교유하며 1920년 3월 25일 임시정부 국무원(國務院) 참사(參事)로 임명되었다. 이후 이승만의 권유로 1922년 독일로 유학길에 올라 튀빙겐대학을 거쳐 뮌헨대학 정경과(政經科)에서 수학하였다. 1927년 5월 학업을 마치고 졸업하였고, 1929년 겨울 귀국하였다. 1930년 9월 4일 이준목(李俊穆)·김갑수(金甲洙) 등과 함께 전주의 특산물인 생강(生薑)을 생산하는 봉상산업조합(鳳翔産業組合)을 결성하였다. 조합을 결성한 한 뒤 저금리 대출, 공동판로 개척 등의 사업을 시행하며 생강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고리대금음 없애고 직거래를 통해 격을 보장하며 전주 일대 농촌자립 경제형성에 기여하였다. 아울러 성공적인 조합운영으로 마련된 수익금으로 1937년 조합 내 병원을 짓고 생산농민들에게 많은 의료혜택을 시행하였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에는 군산(群山)의 농기구 생산공장인 조선이기공업사(朝鮮利器工業社)를 인수하여 사장을 역임하였고 1954년에는 9대 농림부장관(農林部長官)을 역임하였다. 그 후 노년에 교편을 잡고 전북대학교(全北大學校)에서 독일어 강사로 생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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