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인순
尹仁淳1880. 3. 1 ~ 1909. 3. 1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허위 의병부대
- · 이은찬 의병부대
- · 13도창의군
포상 정보
- · 독립장(198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82) 1880년 3월 1일 경기 양주군(楊州郡) 남면(南面) 구암리(龜巖里)에서 윤석하(尹錫夏)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윤인순(尹仁順)을 사용하였다. 경기도 동북부 지역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8월 1일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자 양주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해 봉기하였다. 경기도 양주(楊州) 석치(石峙)에서 활동하다 파주(坡州)·적성(積城)·포천(抱川) 등지를 주무대로 활약하였다. 1907년 말에 각 지역 의병부대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연합의병부대를 도모할 때 함께하였다. 당시 의병장 허위(許蔿)와 의병장 이인영(李認榮) 의병부대가 중심이 되어 전국의 의병연합체인 13도창의군을 조직하였다. 13도창의군이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편제를 갖춘 후,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해 시도하였으나 좌절되었다. 그 후 허위를 대장으로 임진강 일대에서 잔류 의병들을 규합하여 세력 확대를 꾀할 때 허위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허위 의병부대 내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국내의 세력 규합은 물론, 대외적으로 중국 혁명당에 밀서를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하는 등의 제휴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1908년 2월 27일 이은찬(李殷贊)·정용대(鄭用大) 등 3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경기도 양주군 석우리(石隅里) 북방 고지에서 양주·축산리(畜産里)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헌병 연합부대와 대격전을 벌여 큰 타격을 주었다. 1908년 6월 연천(漣川)에 머물고 있던 허위가 일제 헌병에 체포된 이후 다른 의병부대와 같이 30~40명을 단위로 하는 소규모 부대로써 파주·적성·양주 등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은찬이 1908년 6월 허위가 체포된 후 의병의 진로를 모색한 끝에 해외로 거점을 옮길 계획을 세우자 처음에는 함께 하고자 하였으나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이은찬이 또다시 유인석이 활동하고 있던 중국을 향해 출발했지만 일이 여의치 않자 경기도로 되돌아와 왔을 때 흩어진 의병들을 불러 모으고, 10월경에 포고문을 배포하고 의병부대의 명칭을 창의원수부(倡義元帥府)라고 표방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 때 좌군장이 되어 주요 구성원으로 활약하였다. 아울러 긴밀한 관계에 있던 정용대가 우군장을 맡았다. 그 외에도 휘하에는 해산군인인 선봉장 김종운, 참모장 홍원유(洪元有) 외에 노재훈(盧在勳) 등의 부장이 있었다. 1909년에는 이은찬·정용대·강기동(姜基東)·연기우(延起羽) 등과 연합부대를 형성하여 양주·파주·포천·영평(永平)·연천(連川)·삭녕(朔寧)·금천(衿川)·백천(白川) 등 연안을 연결하는 해상과 도서지방 등에서 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항전을 계속하던 중, 1909년 3월 17일 양주 북방 4리 문암(文岩)에서 일본군 삭령수비대와의 전투 중 부하 16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권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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