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호
權在浩1870. 6. 1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0) 1870년 6월 1일 평안북도 자성군(慈城郡) 자성면(慈城面) 읍내동(邑內洞)에서 출생하였다. 가족관계와 성장 과정은 자료의 한계로 알기 어렵다. 이명은 권병무(權秉武)·권시용(權時用)·권태일(權泰一)·권재호(權載浩)이다. 독립운동을 할 시기에는 이명인 권병무를 더 많이 사용하였다. 고향인 자성군에서 금융조합 평의원(評議員)으로 살다가 조합 자금을 빼내 1919년을 전후한 무렵 서간도(西間島)로 망명하였다. 1919년 3월 서간도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인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하였다. 한족회는 서간도 최초의 한인 자치단체인 경학사(耕學社)와 그를 이은 부민단(扶民團)을 계승해 1919년 1월 설립된 자치와 항일을 겸한 독립운동 단체다. 한족회는 중앙조직을 구성하고, 서간도 각지에 산재한 한인들의 삶을 지원하고 이끌기 위해 지방조직을 설치하였다. 지방조직의 통동(通東) 총관(總管)에 임명되었다. 통동 지방은 퉁화현(通化縣) 동쪽 지방을 가리키며, 통동 총관은 이주 한인 1,000가구를 관할하며 자치를 이끄는 직책이었다. 주요 업무는 자금을 모아 농기구를 구입해 한인들에게 대여해주는 일, 대규모 농장을 구입해 공동 작업을 실시한 후 산출된 농산물을 분배하는 일 등이었다. 또한, 중앙조직이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한인들에게 의무금을 징수해 보내는 일과 항일 활동을 위한 통신업무 등도 지방조직의 업무였다. 1919년 3월 1일 전 민족적인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한족회 지휘부도 같은 달 13일 독립 만세 발회식을 개최하고 서간도 한인들을 대규모 결집시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독립을 향한 고조된 열기를 적극적 독립운동으로 전환시키려고 이를 총괄할 군정부(軍政府)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통동 지방을 책임질 총관이 된 것이다. 지방조직의 책임자였지만, 자치활동에 얽매이지 않고 적극적 항일 활동을 추진한 것으로 판단된다. 1919년 (음)4월 27일에는 생업을 위해 퉁화현에 온 이병철(李秉鐵)을 설득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교시켰다. 무관학교를 졸업한 이병철은 후에 한족회가 설립한 독립군단(獨立軍團)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소속 독립군이 되어 활발한 항일무장 활동을 펼쳤다. 또 친일의 경향을 보이는 이주 한인은 총관사무소로 잡아들여 교화하고 군자금을 내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적극적 항일 활동을 펼치자 일제도 주목하여 퉁화영사관 분관(分館) 일제 경찰대가 1919년 8월경 통동총관소를 습격하였다. 1920년 7월 일제는 별동대까지 구성해 총관 사무소 및 자택을 습격해오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서로군정서 소속 암살대장인 신광재(辛光在)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던 때였다. 신광재는 서로군정서 의용군과는 별도로 채찬(蔡燦, 이명 백광운(白狂雲))과 함께 신흥무관학교 출신들로만 암살대를 구성해 국내 진입이 쉬운 지안현(輯安縣) 추피구(揪皮溝)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활동하고 있었다. 암살대는 수시로 압록강을 넘어 평북 자성과 강계군(江界郡)으로 진입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제 침략 기관을 공격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별동대까지 구성해 암살대와 그 지원 세력까지 공격해왔던 것이다. 일제 경찰대의 기습공격을 간파하고 사전에 피신해 화를 면하였다. 1919년 11월 한족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협의해 자체 내에 건립한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개편하였다. 하나의 국가에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는 관점에서 상하이(上海)에 수립된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그 산하의 독립군단이 된 것이다. 서로군정서를 책임질 독판(督辦)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 선임되고, 그 밑에 정무청(政務廳)·내무사(內務司)·법무사(法務司)·재무사(財務司)·학무사(學務司)·군무사(軍務司)·참모부(參謀部) 등 자치행정 부서와 무장활동을 수행할 의용군 사령부가 편성되었다. 정무청 소속 교섭과장에 임명되었는데, 정무청장은 이탁(李沰)이었고, 같은 소속부서로는 검찰(檢察)과 통계과(統計課)가 있었다. 정무청 소속의 교섭과장이라면 행정적인 업무가 주된 것이었다. 그러나 서로군정서가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단이었기에 임시정부에서 실시하는 연통제(聯通制)에 의해 평북 자성 군감(郡監)의 직책까지 맡아 군자금 모집 활동에 나섰다. 1921년 7월 13일, 권총을 휴대한 4명의 부하를 이끌고 퉁화현 오도구자(五道溝子)로 향하였다. 이 마을에 거주하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지단장(支團長) 조상호(趙相浩)를 찾아가 자금을 모금해 제공하도록 요청하였다. 향후 방문 시까지 모금해 놓겠다는 조상호의 답을 듣고, 그 집에서 하루 머문 후 한인 마을인 소나권구(小羅圈溝)로 향하였다. 그곳에서도 역시 한인들을 설득해 최대한의 군자금을 제공받았다. 만주 지역이라고는 하지만 무장한 대원들을 이끌고 이처럼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경찰 당국의 묵인 덕분이었다. 교섭과장을 맡을 정도로 사교적인 데다 중국어에 능하여, 퉁화현을 비롯해 그 주변 지역을 책임지고 있는 열수하자(熱水河子) 소재의 중국 순경국 국장과 절친한 관계였다. 따라서 상관의 명령을 받은 중국 순경들은 이 군자금 모집대의 활동을 눈감아 주었던 것이다. 1921년 11월경에는 동지 김윤식(金潤植)과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공채와 유고문(諭告文)을 가지고 부호들을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았다. 유고문은 남만주(南滿洲)에 주둔하고 있는 1만 8,000명의 독립군이 국내 진입 작전을 펼치려면 40만 원의 군자금이 필요하니 적극적으로 협조하라는 내용이었다. 1922년 6월 4일에는 대원 5명을 이끌고 퉁화현 철창자(鐵廠子) 한인 마을로 갔다.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모아 놓고, 독립군의 무장 활동을 위해서는 군자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니 협조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며칠 동안 이 마을에 머무르며 주변의 한인 마을까지 연락을 취해 상당액의 자금을 모금하였다. 서로군정서 간부로서 이러한 군자금 모집 활동과 함께 직접 무장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21년 8월 초순, 대장 신광재가 병이 들어 활동하기 어려워지자 지안현에 있는 암살대 근거지로 갔다. 이미 50세를 넘겼으나 국내 진입 작전 및 무장 활동 계획을 세우며 대원들을 지휘하였다. 1922년 6월경에는 관뎬현(寬甸縣)에 본부를 둔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제3영장(營長) 변창근(邊昌根)과 연계를 가지며 합동 작전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런데 서로군정서 간부로서 활동을 벌이는 기간, 서북간도의 독립군 및 한인 사회는 큰 수난을 겪었다. 독립군의 국내 진입 유격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일제는 1920년 10월 약 2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일제 침략군들에 의해 독립군 기지는 물론이고 한인 사회까지 초토화되었다. 3,700명에 가까운 독립군 및 한인이 살해되고 3,300채가 넘는 가옥·학교·교회 등이 파괴 소실되는 참변(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참변(間島慘變))을 당하였다. 이처럼 초토화된 한인 사회와 독립군 기지를 재건하고 독립운동을 이어가기 위해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1921년 후반부터 단체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1922년 초, 서로군정서 및 대한독립단 일부와 광한단(光韓團) 등이 통합해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까지 논의를 계속해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의 17개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서로군정서의 일부가 통의부에 참여하였지만 함께하지 않고 잔류 세력으로 남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일시 사령관이 되어 차천리(車千里)·김만흥(金萬興, 이명 김극모(金極模)) 등과 서로군정서를 재건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통의부는 남만주 한인 사회를 재건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하지만 1922년 후반기부터 구성원 간에 이념 차이로 갈등이 생겼고, 이듬해 초 복벽주의(復辟主義) 계열 인사들이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성립해 이탈하였다. 이어 1924년 중반에는 항일 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채찬·김원상(金元常) 등이 임시정부와 협의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하였다.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단으로 출범한 것이다. 참의부가 성립하자 이에 가담해 활동한 것으로 일제 측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 외 참의부원으로서 구체적인 활동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이 시기가 되면 50대 중반인 나이였기에 한족회에서와 같이 지방조직에 참여해 활동한 것으로 생각되나 확실한 행적은 알기 어렵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