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경
兪致慶1848. 6. 17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호좌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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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5) 1848년 6월 17일 황해도 평산군(平山郡)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자는 경선(景善)이고 호는 도진(桃津)이다. 화서학파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이다. 서북지방 화서학파가 호좌의병부대에 참여해 활동한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특히, 서북지방의 근거지 마련이나 중국지역에서 군사원조, 근거지 마련 등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유인석(柳麟錫)이 “용모와 몸단속 잘하기로는 친구들 중에 으뜸이요, 항상 마음을 다하여 나를 타일러 바른길에서 어긋나지 않게 하는 유익한 벗”이라고 평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서북지방의 대표적인 화서학파 유학자였다. 1896년 고향인 황해도 평산에서 신석원(申錫元)·조두환(趙斗煥)·변석현(邊錫玄) 등 여러 동문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1896년 2월 유인석이 강원도 영월(寧越)에서 호좌의병부대의 총대장으로 등극하자 호좌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참모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896년 4월 호좌의병부대는 충주성을 잃고 제천(堤川)으로 물러나 있는 상황에서 친위대가 원주(原州)·충주(忠州) 방면에서 공격해 들어오자 제천의 근거지를 지키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였다. 이에 국면 전환을 위한 새로운 조치의 일환으로 유인석의 명령을 받아 이필희(李弼熙)·정화용(鄭華鎔) 등과 함께 고향인 서북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호좌의병부대에 호응하는 의병을 일으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서북지역은 개화세력에 의해 장악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관파천 이후 의병운동의 동력이 꺾인 상태였기에 호좌의병부대에 호응하여 의병을 일으킬 분위기를 조성하기 힘들었다. 의병운동의 재기를 위한 기반조성에 실패한 후 평안도에 머물고 있을 때 유인석의 명령을 받은 원용정(元容正)이 찾아왔다. 유인석은 서북지방에서 재기하는 것을 포기하고 압록강을 넘어 청나라의 실력자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지원을 받고자 하였다. 1896년 8월 9일 유인석이 보내는 글을 갖고 이필희(李弼熙)·송상규(宋尙奎)·원용정와 함께 선양(瀋陽)으로 이동하였다. 선양에 도착해서는 호좌의병부대의 주둔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 해 8월 28일 호좌의병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에 도착하였다. 서간도에 도착하자마자 청나라 지방관인 서본우(徐本愚)의 계책에 넘어가 무장 해제를 당하고 한반도로 귀국할 것을 요구받았다. 결국 호좌의병부대는 해산되고 대부분의 의병들은 고향으로 귀국하였다. 유인석은 귀국하지 않고 21명의 제자들만 데리고 선양으로 들어왔다. 이때 유인석에게 “요동지역에 동포들이 많이 들어와 살고 있고, 땅이 개척된 지 오래지 않아 기름지니 이곳을 근거로 하여 백성을 가르치고 앞날을 도모하자”고 주장하였다. 유인석도 동의하여 퉁화현(通化縣) 오도구(五道溝)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원용정과 함께 청나라에 원조를 구하는 일을 계속해서 추진할 것을 요청하였다. 선양에서의 군사 원조 요청은 그 지방의 장군이 가원계(賈元桂)를 보내 협상에 응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일본과 화의를 이유로 군사 원조는 거절당하였다. 더욱이 장기간 진행된 활동에 자금이 떨어지면서 외로운 이국의 나그네 신세가 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군사 원조 활동 실패 후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로 이동하여 공자상(孔子像)을 봉안하고 돌아왔다. 이후 유인석이 1897년 만주에서 일시 귀국하여 서북지방에 머물었을 때 변석현 등과 함께 합류하여 강학하였다. 1907년 의병전쟁 시기에는 만주에 근거지를 건설하기 위해 황해도 지역의 유림들에게 동참을 호소하는 서한을 발송하는 등 의병운동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심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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