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元守
元守미상 ~ 1908. 4. 25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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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5) 자료의 한계로 출생연월일, 출신지역 등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1905년에 을사늑약의 체결로 일제에게 외교권을 빼앗기고, 1907년에 고종이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되었으며,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차관 정치가 시작되는 등 일제의 국권 침탈이 심화되었다. 이와 함께 1907년 8월 1일에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해산된 군인들은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의병에 합류하는 등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07년 7월 정용기(鄭鏞基)의 부하가 되어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정용기는 아버지였던 정환직(鄭煥直)과 함께 경상북도 영천(永川)출신으로 경북 일대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같은 해 9월 정용기가 전사하자 정환직의 부하가 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최대장(崔隊長)의 부하가 되어 활약하였다. 최대장이 인솔하는 의병부대는 100명 정도 되었으나, 1908년 4월 14일 방흥(方興, 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았으며, 관암(冠岩, 현 포항시 북구 기북면 관천리)·고통(古通, 현 기북면 대곡리)·신기(新基) 부근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후, 같은 달 17일 밤에 덕동(德洞, 현 경주시 천군동)에서 의병이 해산하자, 귀향하였다. 그러나 그 해 4월 20일에 대구(大邱)에서 순사대가 찾아오자 저녁 때 침구와 식기를 산으로 운반하고 몸을 피하였다. 그러나 영천군(永川郡) 동북쪽 약 8리의 산현동(山峴洞)에서 붙잡혔다. 동지들이었던 변경조(卞敬助)는 1908년 4월 17일에 일본군 경주 수비대 제12중대 소속의 의병 토벌대와 격전 중에 붙잡혔으며, 박대중(朴大重)은 같은 해 4월 19일에 영천군 동북쪽 약 6리 거동(巨洞, 현 영천시 자양면)의 자택에서 붙잡혔다. 1908년 4월 25일 오전 4시에 변경조·박대중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정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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