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현
尹昇鉉1912. 12. 7 ~ 1950. 11. 1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전남노농협의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동맹휴학 사건
- · 전남노농협의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912년 12월 7일 전라남도 나주군(羅州郡) 남평면(南平面) 남석리(藍石里)에서 아버지 윤종혁(尹宗赫)과 어머니 이호정(李湖亭)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이산(伊山), 이명은 손정수(孫正洙)이다. 1989년 옛 동지들과 친인척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의사 이산 윤승현기적비(義士伊山尹昇鉉紀蹟碑)’(나주시 남평읍 남평초등학교 내 위치)에는 생년월일이 1910년 10월 1일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 6월 조선인 본위 교육의 실현,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으로 퇴학당한 이경채(李景采)의 복교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투쟁을 벌이다가 퇴학당하였다. 이에 같은 해 7월 10일경 동급생, 선후배들과 함께 광주읍내에 맹휴중앙본부를 설치하고 참모부·통신부·외교부·회계부를 두어 9월 초까지 투쟁을 이어갔다. 7월 16일경부터 8월 30일경까지 정동화(鄭東華)·박세영(朴世永)·이만동(李萬童)·김부득(金富得)·김기권(金基權)·최규창(崔圭昌)·임주홍(林周弘) 등과 함께 맹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의 「통고문」 4종, 학생·학부형회·졸업생대책회·학교당국 등의 동향을 정리한 「집행본부 경과보고」, 광주고보 교장에게 보내는 「경고문」, 각 보통학교 교장에게 보내는 「항의문」, 끝까지 싸우자고 독려하는 「격문」, 학교당국에 굴복한 학생 및 학부형들에 대한 경고를 담은 「격문」, 학교당국의 휴교 및 귀향 조치에 맞서 대규모 집회계획을 담은 「상광후의 실행요목」, 「규약」, 「표어」 등을 수십에서 수백 부씩 제작하여 학생·학부형·학교당국에 배포·발송하였다. 투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8월 중순부터 광주를 비롯한 전남 각지의 경찰이 총 출동하여 맹휴 주도 학생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경찰의 수사망을 돌파하여 체포는 면할 수 있었지만 검거된 학생들에 대한 1심 판결이 내려진 다음 날인 1928년 10월 6일 공식적으로 퇴학처분을 받았다. 1929년 봄 일본 도쿄(東京)로 가서 노동에 종사하면서 강의록을 통해 독학하였고 사상방면의 팸플릿 등도 탐독하였다. 그러다가 병을 얻어 1930년 8월 귀국한 뒤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 1931년 1월경부터 광주를 왕래하며 김호선(金好善)·김준수(金俊琇)와 교류하였다. 8월경에는 지하운동을 하고 있던 공산주의자 이응규(李應奎, 일명 李友狄)·김기선(金琪善, 일명 金相赫)과도 선이 닿았다. 이응규와 김기선은 1927년 이래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의 일본 조직에서 간부로 활동하였고, 1931년 7월 25일 경북 대구에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를 결성하여 해체된 조선공산당 재건을 꾀하고 있었다. 1931년 12월 19일 광주읍에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의 이응규와 김기선, 광주노동조합의 김호선·김준수·송회갑(宋晦甲), 전남농민조합의 김영재(金永才, 일명 金永錫)와 정시환(鄭時煥, 일명 鄭領), 전남노농협의회 임시사무국의 김백동(金百東, 일명 權逢春)과 박만춘(朴晩春, 일명 朴基春)과 함께 열성자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서기를 맡아 의장 김기선을 보좌하며 의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전남 각지의 혁명적 노동조합·농민조합 및 반제동맹의 건설과 연락 통일을 도모할 기관으로서 전남노농협의회(全南勞農協議會)를 결성하고 농민부와 출판부 책임을 맡았다. 농민부 책임자로 1931년 12월 하순 전남 나주군 남평면 우산리(雨山里)의 민풍진흥회장(民風振興會長) 송성수(宋聖秀)를 전남노농협의회에 가입시켰다. 1932년 1월 하순에는 농민부 부원 정시환·김재동(金載棟)과 회합하여 전남을 3개 구역으로 나누고, 화순·보성·영암·해남·장흥·강진·진도·완도의 각 군을 맡아 동지의 교양, 규합에 노력하였다. 출판부 책임자로서 1932년 2월 김호선·최창진(崔昌鎭)과 공동으로 전남노농협의회 기관지인 『전남노동자신문』 약 150부, 『학생뉴스』 약 30부, 3·1운동 기념 격문 약 150부를 각 인쇄·제작하였다. 『전남노동자신문』은 회원과 협력단체 등에 배포 완료하였지만 『학생뉴스』와 3·1운동 기념 격문을 미처 배포하지 못하고 붙잡혔다. 1932년 4월 2일 나주 자택에서 광주경찰서 형사대에 붙잡혔다. 1934년 11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1935년 1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았다. 붙잡힌 후 1심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무려 2년 8개월 동안 미결 상태로 열악한 형무소 생활을 견뎠다. 반제부 책임자 김준수가 예심 중 사망할 정도였다.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1936년 1월 30일 출옥하였다. 1938년 10월 25일 목포에서 창설된 협동운수주식회사의 감사역을 맡아 1943년경까지 재임하였다. 그 후 경기도 청평(淸平)에서 숯을 굽는 한편 신탄(薪炭) 관련 잡지를 발간하였다. 광복 후에는 조선연료회사를 경영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귀향길에 올랐다가 1950년 11월 17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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