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교병
尹喬炳1881. 8. 28 ~ 1930. 9. 3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논산군 노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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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1년 8월 28일 충청남도 논산군(論山郡) 노성면(魯城面) 병사리(丙舍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노성(魯城)이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3일 노성면 장날 장꾼들과 합세하여 200여 명의 군중이 모이자 이때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의 체포를 피해 은신하던 중 1919년 (음)7월 서울 창성동(昌城洞)에서 중국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 정상섭(鄭詳燮)을 만났다.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결의한 나상필(羅相泌)이 찾아와 독립을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자고 하자 이에 찬동하고 논산의 부호를 소개하기로 하였다. 1919년 (음)10월 나상필과 함께 전북 익산군(益山郡) 용안면(龍安面) 돈다리(敦多里)에 거주하던 이규석(李圭錫)을 찾아가 그로부터 70원을 모금하였다. 1919년 (음)11월 나상필과 함께 충남 논산군에 살고 있던 친척 윤일병(尹一炳)을 찾아가 100원을 모금하였다. 1920년 (음)4, 5월에는 노성면 죽림리(竹林里)에 살고 있던 친척 윤임중(尹任重)의 집에 찾아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고 있다고 밝히고 350원을 모금하였다. 같은 해 (음)6월에도 나상필과 더불어 인척관계인 경북 봉화군 법전면(法田面) 척곡리(尺谷里) 강봉원(姜鳳元)의 집에 찾아가 강봉원의 장남 강문창(姜聞昌)에게 이시영(李始榮)이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리며 그를 위해 군자금을 송부하자고 제안하여 40원을 모금하였다. 또 그 해 (음)7월에는 나상필과 함께 조카인 충남 보령군 미산면(嵋山面) 용수리(龍水里) 이시우(李是雨)의 집에 찾아가 군자금 명목으로 40원을 모금하였다. 이처럼 주로 혈연적 유대를 바탕으로 노성 윤씨를 비롯하여 친·인척 관계를 중심으로 충남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 전개하였다. 이후 박기서(朴起緖)의 소개로 임시정부 특파원 정태유(鄭泰愈)로부터 임시정부 발행 1,000원의 공채증서를 받게 된 나상필과 함께 구체적인 군자금 모금 방법에 대해 논의하였다. 나상필로부터 받은 임시정부 공채를 가지고 1921년 (음)3월에 다시 윤임중을 찾아가 지난번에 모금한 350원을 제외한 650원을 출금하면 1,000원짜리 독립공채증서를 주겠다고 하였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같은 해 (음)4월에는 나상필과 함께 논산군 구자곡면(九子谷面) 삼전리(三田里)에 거주하던 이정우(李貞雨)를 찾아가 이 지역 부호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해달라고 하여, 그가 이 증서를 가지고 (음)4월 이규석을 찾아가 이전에 모금한 70원을 제외한 930원을 추가로 내면 1,000원의 독립공채 증서를 주겠다고 하였으나 그가 응하지 않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1921년 (음)3월 나상필과 함께 전주(全州)에 살고 있던 김종진(金種振)에게 찾아가 군자금 명목으로 10원을 모금하였다. 1919년 말부터 임시정부에 송금하기 위해 나상필과 함께 충남 일대를 중심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모금한 군자금은 650원 가량이었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중 1921년 4월 이를 탐지하고 충남 논산으로 출장 온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붙잡혔다. 1921년 10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과 공갈 등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옥고의 후유증으로 1930년 9월 30일 사망하여 논산군 상월면(上月面) 지경리(地境里)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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