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윤관도

尹觀道

미상 ~ 1919. 3. 4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윤관도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평남 강서(江西)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강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국장(1996)

관련 사건

  • · 1919년 강서군 반석면 반석면 상사리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6)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성태면(星台面) 출신이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윤관도(尹寬道)를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금제면(金祭面) 원장리(院場里) 원장시장(院場市場)과 강서군 반석면(班石面) 상사리(上四里) 사천시장(沙川市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 헌병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강서군 반석면 사천시장 만세시위는 원장시장의 만세시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원장시장의 만세시위를 준비한 것은 기독교인들이었다. 시위가 일어난 금제면 원장리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는 각각 대동군과 강서군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장날에는 서로 왕래가 잦았다. 장로교 소속 교회 네 곳도 서로 인접하여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다. 원장리에는 원장교회(院場敎會)가 자리하였고 그로부터 남쪽 3km 지점 산수리(山水里)에는 산수리교회(山水里敎會)가 있었다. 상사리(上四里)에는 반석교회(盤石敎會)가 있었고 여기서 10km 떨어진 반석면 반육리(班六里)에는 사천교회(沙川敎會)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제일 먼저 만세시위 준비에 나선 사람은 반석교회 지도자이자 반석학교(班石學校) 설립자인 조진탁(曺振鐸)이었다. 1919년 2월 28일 평양을 들렀다가 다음날인 3월 1일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거행된 독립선포식과 거리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조진탁은 몇 장의 독립선언서를 얻어 귀가하는 길에 원장교회에 들렀다. 원장교회 간부인 윤상열(尹相悅)·고지형(高志亨)·차현구(車玄九)를 만나 평양의 만세시위를 알리고 원장교회와 반석교회·산수리교회·사천교회가 연합하여 원장 장날인 3월 4일 대대적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였다. 원장교회 간부인 윤상열·고지형·차현구는 곧바로 원장교회 부설 합성학교(合成學校) 교감인 임이걸(林利杰)과 산수리교회 간부인 조승익(曺承翊)에게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차현구는 반석교회 간부인 최능현(崔能賢)·백이옥(白履玉)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최능현은 사천교회 송현근(宋賢根) 목사에게 거사 계획을 알렸다. 송현근 목사는 김해진(金海鎭)의 집에 교회 간부를 소집하여 3월 4일 사천시장에서 따로 만세시위를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시위 준비가 헌병보조원에게 발각되어 김해진과 최양근(崔養根) 등 10여 명이 체포되고 말았다. 다행히 검거를 피한 송현근은 회동(檜洞)이라는 옆 마을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쫓기어 조진탁의 집에 숨었다. 그럼에도 3월 4일 10시 원장리에 있는 합성학교 운동장에서는 원장교회·반석교회·산수리교회 교인 1,000여 명이 모여 원장교회 간부들의 주도로 독립선포식을 거행하였다. 차병규(車炳奎)의 기도로 시작하여 지석용(池錫湧)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임이걸이 독립선포식을 가져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40분간 연설하였다. 그리고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나팔수를 선두로 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원장시장을 향해 행진하였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합성학교 교정으로 돌아올 때는 원장보통학교 학생을 포함해 많은 군중이 뒤를 따랐다. 합성학교 운동장에서 최능현과 송현근은 시위군중에게 사천시장 시위 준비가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체포되었음을 알리고 헌병분견소 유치장에 갇힌 동지들을 구하자고 호소하였다. 시위 군중은 이에 호응하며 청년이 선두에 서고 노인과 여성들이 뒤따르며 헌병분견소가 있는 사천시장으로 향하였다. 이로써 원장시장 시위는 사천시장 시위로 전개되었다. 사천시장에 거의 도착한 시위대는 언덕길을 넘으려 했다. 그런데 이때 헌병분견소장인 사토(佐藤實太郞)와 헌병보조원들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총을 맞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수많은 사상자가 발행했고 격분한 시위 군중은 돌을 던지며 행진을 계속하였다. 결국 사토는 분견소에 몸을 숨기고 계속 총을 쏘았고 헌병보조원들은 도망갔다. 시위 군중들이 분견소에 불을 지르자 사토는 도망가다 죽임을 당하였고 헌병보조원 2명도 시위대에 맞아 죽었다. 시위군중은 유치장에 갇혀 있던 동지들을 구출하였다. 3월 4일 이처럼 격렬하게 진행된 사천시장 시위에서 사망한 사람은 19명에 이르렀고 부상자는 40여 명에 달하였다. 부상자들은 응급처치 후 평양으로 급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이 때 총을 맞고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원장리에 사는 의생 김치산(金致珊)이 손을 쓸 수 없다고 판단하여 평양의 기홀병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