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환
柳東煥1885. 1. 20 ~ 1973. 8. 2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동군 임동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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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5년 1월 20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동면(臨東面) 수곡동(水谷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21일 안동군 임동면 중평동(中坪洞) 편항시장(鞭巷市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안동군 편향시장 만세운동은 월곡면(月谷面) 계곡동(桂谷洞)에 사는 유연성(柳淵成)의 주도 하에 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박재식(朴載植) 등이 뜻을 모아 일으켰다. 이들은 3월 15일 편항시장 동편 공동 타작장[인낙장(籾落場)]에서 만나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임동면을 여러 곳으로 나누어 분담 지역을 정하고 담당 지역의 주민들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수곡동은 유교희(柳敎熙)가 맡았는데, 유교희는 주민들에게 3월 21일 편항시장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날 예정임을 알리고 동참을 호소하였다. 유교희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거사 당일, 편항시장으로 향하였다. 오후 2시 유연성이 군중들 앞으로 나와서 왜 만세운동을 해야 하는지 연설을 하고 이어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유연성의 선창에 다른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호응하였다. 장터 곳곳에서 만세 소리가 연이어 일어났고 많은 주민들이 동참하면서 만세운동의 열기는 점점 더 고조되었다. 만세운동이 장터 전체로 퍼지고 있을 때 일제 경찰이 시위 현장에 급파되었다. 출동한 일제 경찰은 무력으로 시위대를 위협하며 해산을 명령하고 주도인물 체포에 나섰다. 유연성과 참여자 배태근(裵太根)을 체포하려던 일제 경찰에게 배태근이 항의하자 일제 경찰 한 명이 배태근의 뺨을 때렸다. 이를 보고 다른 군중들과 함께 분노하여 “저놈 죽여라”하며 일제 경찰에게 달려들었고, 일제 경찰은 군중들의 기세에 놀라 주재소로 도망하였다. 이어서 5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로 향하였다. 조학이(趙學伊)·박진선(朴晋先) 등이 선두가 되어 시위대를 이끌고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주재소에 이르러 다른 시위대와 함께 일제 경찰의 권총 위협에도 안으로 들어가 주재소 벽과 창문 등을 돌과 몽둥이로 모두 부셔버렸다. 또 사무실 안의 유리창과 책상, 의자 등의 기물 등을 모두 파괴하고 서류와 문부도 모두 찢어 창문 밖으로 던져 파기하였다. 일제 경찰에게서 빼앗은 권총과 대검은 주재소 안에 비치된 탄환, 총검과 함께 주재소 뜰에 있는 우물 안에 버렸다. 그리고 배혁모(裵赫模)·권중희(權重熙)·유기영(柳璣永) 등과 함께 경찰 숙소로 향하였다. 돌을 던져 경찰 숙소의 벽과 창문을 모두 부수고 숙소 안의 물품과 서류, 의복 등도 모두 파괴해 버렸다. 주재소와 경찰 숙소는 시위대의 격렬한 저항에 뼈대만 겨우 남은 채 초토화 되었다. 경찰 숙소 시위를 마치고 일부 군중들과 해산하였다. 1,000명이 넘는 군중들은 남아서 면사무소에서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는 면사무소마저 초토화시킨 후 새벽 3시 무렵 자진 해산하였다. 일제 경찰은 다음날부터 만세운동 관련자 체포에 나섰고, 이때 붙잡혔다. 1919년 4월 17일 대구지검으로 이감되었으며, 같은 해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건조물 손괴죄, 가택침입죄, 상해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재판 결과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그 해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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