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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훈

金敎勳

1880. 10. 20 ~ 1934.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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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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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서울특별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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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조선국권회복단
  • · 국민대회
  • · 한성정부
  • · 대한민국임시정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9)

관련 사건

  • · 국민대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9) 1880년 10월 20일 서울 훈동(勳洞)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충청남도 대전군 유성면 복룡리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이명은 김훈(金勳)·김학노(金學老)·김규(金圭)·김규(金奎)를 썼다. 1908년 충남과 강원 일대에서 의병 항쟁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같은 해 (음)3월부터 6월까지 4개월 여 옥고를 겪었다. 1915년 경북 달성군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의 권유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음)1월 15일 경북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 안일암(安逸庵)에서 달성친목회와 그 부속기관인 강의원간친회(講義園懇親會)를 기반으로 조직되었다. 국내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국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여 최후로 독립을 쟁취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중앙 간부는 통령(統領)에 윤상태(尹相泰, 달성), 외교부장 서상일, 교통부장 이시영(대구)·박영모(합천), 기밀부장 홍주일(청도), 문서부장 이영국(대구)·서병용(대구), 유세부장 정순영(대구), 결사대장 황병기(전라)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때 권유부장을 맡았다. 대구를 기반으로 하는 부호 또는 중산층·계몽주의자·신학문 이수자·유생 등이 주축을 이루었고, 점차 의병 투쟁 관련자와 유림이 폭넓게 참여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는 경남 함안·진주 등지에 신상태와 변상태 등 2명을 파견하여 일대 시위 투쟁을 전개하도록 하였는데 동지의 밀고로 관련 인물 28명 중 13명이 체포되었다. 중앙총부의 유세부장을 맡고 있던 정순영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간의 연락 업무를 담당하였다. 1916~1917년 무렵 박상진을 비롯한 대한광복회 회원 수십 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될 때 검거망을 피해 정순영과 함께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1919년 3월 초 서울에서 이교헌(李敎憲)·윤이병(尹履炳) 등과 함께 이규갑(李奎甲)에게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4월 2일 각계 대표 20여 명이 인천 만국공원(萬國公園)에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선포할 것을 결정하였는데, 이 자리에 유림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결과 1919년 4월 23일 서울에서 13도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대회(國民大會)’를 개최하고 한성(임시)정부를 선포하였다. 일제 당국은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 추진 과정에서 그에 대해 “주모자로서 별명을 김학노(金學老)·김규(金奎)·또는 김훈(金勳)이라고 일컬으며 유생 출신으로 항상 배일사상을 가지고 일찍이 한국 정부 시대에는 폭도에 가담하여 충남·강원을 휩쓴 무뢰한으로 금년 1919년 3월 손병희 일파가 독립선언을 하자 그 뜻을 승인하고 전기 피고 등과 모의하여 경성 장안에서 독립운동단(獨立運動團)을 조직하여 청년·예수·천도교의 각 단체원과 교섭하여 ‘국민대회’란 명칭하에 그 취지서를 인쇄, 경성 장안에 살포해 인심을 선동하는 데 힘썼다”라고 파악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 측과 협의, 독립운동자금 모집 사명을 띠고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출범 직후 임시정부는 만주 소항령(蘇項嶺)에서 노백린(盧伯麟)을 교관으로 하여 3만 명의 병력을 훈련하기 위한 자금 마련에 고심하고 있었다. 이에 정상진 등 동지들과 협의하여 각 지방의 부호들에게 자금을 조달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솔선하여 협조하지 않아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금 모집 방법을 변경, 중국 지폐를 위조할 계획을 세워 이를 추진하였으나 자금 부족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최후의 수단으로 동지 5명을 경북 김천역 앞 김기영의 집에 체류하게 하면서 역시 같은 지방에 거주하는 동지 김두형으로 하여금 전북 김제군 초처면(草處面) 구정리(九井里) 소재 송시용의 토지 약 800두락의 토지대장 등본을 위조한 후 서울로 가져와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초처면장 명의의 위조 관인(官印)을 사용하였으나 다시 실패하였다. 1919년 6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9개월 이상의 옥고를 겪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면소, 방면되었다. 1920년 3월 이후 평양에서 경주 김씨 계림군파 족보 제작 일에 전념하다가 1934년 1월 9일 평양에서 운명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유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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