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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康勳

康勳

1903. 6. 13 ~ 2003.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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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康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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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김화(金化)중국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강원도 김화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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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신민부
  • · 남화한인청년연맹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관련 사건

  • · 육삼정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77) 1903년 6월 13일 강원도 김화군(金化郡) 김화읍(金化邑) 샘골(泉洞)에서 이기원(李起源)과 재령(載寧) 강씨(康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청뢰(靑雷)이다. 1910년, 샘골에서 서면(西面) 청양리(淸陽里) 늪골(지금의 연동(淵洞))로 이사하여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915년 5월 부친을 잃고 이모가 사는 철원으로 가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 국가를 부르는 것이 싫다”라고 하여 학교를 그만두고 독학하였다. 1918년 1월 고씨(高氏)와 결혼하였다. 1919년 여름 신의주(新義州)와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을 다녀온 뒤,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먹고 이듬해 2월 북간도로 향하였다. 북간도에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간부로 활동하는 외육촌형 강학성(康學成)의 주선으로 명동학교(明洞學校) 설립자인 김약연(金躍淵),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령관인 김좌진(金佐鎭) 등을 만나고 상하이(上海)로 떠났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인 이동휘(李東輝)를 만나 독립운동 상황을 듣고 배우며 교류하였으나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1921년 4월 다시 북간도로 이동하였다. 이후 북로군정서 지도자들을 찾아 왕칭현(汪淸縣) 오지인 대황구(大荒溝)에서 이홍래(李鴻來)와 항일의식이 투철한 중국인 주더청(朱德成)의 도움으로 중국 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출신 김하준(金河駿)과 도요(東洋)대학 철학과 출신 김연수(金演秀)로부터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이론에 대해 배웠고, 무정부주의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924년 5월 1일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북간도로 돌아오는 도중, 선양(瀋陽)에서 일본영사관 경찰에 끌려갔다가 김화경찰서로 압송되어 고문과 함께 취조를 받았다. 사범학교 학생임이 밝혀져 풀려났다. 북간도로 돌아와 김좌진 등이 활동하고 있는 신민부(新民府)를 찾아갈 계획을 세웠다. 이즈음 신민부 연락원으로부터 국내 연락망 구축과 군자금 모집을 지시받고 국내로 잠입하여 청진(淸津)의 부호 김기덕(金基德)으로부터 군자금 1만원을 받고, 북청·삼수·갑산 등지에 신민부 연락망을 구축하였다. 1925년 9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寧安縣) 영고탑(寧古塔)으로 가서 신민부 지도자들을 만나고 11월 신민부 별동대원으로 선발되었다. 이후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군경의 기습으로 별동대원 7명과 붙잡혀 8개월간 닝안현(寧安縣)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신민부 간부들의 노력으로 풀려났다. 1926년 7월 30여 명의 별동대와 지린성(吉林省) 안투현(安圖縣) 삼인반(三人班)에 파견되어 지방조직을 설치하고 그곳에 남아 신창학교(新彰學校)를 설립하고 교사가 되어 한인 2세들을 교육시켰다. 이후 둔화현(敦化縣)·미샨현(密山縣) 등을 옮겨가며 2세 교육에 전념하였다. 1929년 음력 12월 25일 김좌진이 사망하자, 동지들과 장례를 치른 뒤 구강포참(九江泡站)에 있는 동신학교(東新學校)에서 교육사업을 지속하였다. 1931년 이후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1932년 9월 상하이로 이동하였으며, 백정기(白貞基)·이달(李達)·엄형순(嚴亨淳) 등을 만나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였다. 1933년 3월 17일 주상하이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중국 관료들과 상하이 공동조계 내 일본식 식당인 육삼정(六三亭)에서 회의를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3월 5일 프랑스 조계 백정기의 숙소에 모여 거사 계획을 논의하였다. 제비뽑기로 결정한 끝에 백정기와 함께 거사 담당자로 결정되었다. 원심창(元心昌)은 현장 안내를 맡았다. 의거 주도 모임을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으로 정하고, 김구(金九)에게 받은 홍커우(虹口)공원 의거 당시 사용한 것과 위력이 같은 폭탄과 권총 2정 및 수류탄 1개도 준비하였다. 다음날부터 아리요시의 사진을 구해 얼굴을 익히고, 타고 다니는 승용차의 차종과 번호까지 외웠다. 또 육삼정 주변의 도로와 건물들을 수십 번 왕래하며 의거를 준비하였다. 3월 17일 오후 8시경 아리요시가 도착할 무렵, 대기 장소인 육삼정 맞은 편 중국요리점 송강춘(宋江春)으로 원심창과 백정기가 올라갔다가, 2층으로 간 원심창이 오지 말라며 손짓하며 뛰쳐 내려왔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일제 경찰과 그곳 치안 담당 영국경찰에 붙잡혔다. 백정기·원심창과 함께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서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일본 나가사키(長崎)지방재판소로 이송되었다. 1933년 11월 28일 징역 1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두 차례의 감형으로 1942년 7월 25일 풀려났으나, “출옥 후 어떤 생활을 하겠느냐?”는 일제 검시관의 질문에 “다시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고 대답하여 다시 도쿄 도요다마(豊多摩) 예방구금소에 구금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5년 10월 10일 풀려났다. 이후 재일 한인사회 인사들과 윤봉길·이봉창(李奉昌)·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발굴한 뒤, 1946년 7월 6일 국내로 봉환하였다. 세 의사의 유해는 국민장(國民葬)을 지내고 서울 효창공원(孝昌公園)에 안장하였다.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한국거류민단(在日韓國居留民團) 부단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60년 3월 영주 귀국하였다. 이후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독립운동사 편찬사업을 벌였고, 독립유공자 심사자료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 『항일독립운동사』, 『무장(武裝)독립운동사』, 『대한민국임시정부사』, 『해외독립운동사』, 『마적(馬賊)과 왜적(倭賊)』, 『청사(靑史)에 빛나는 선열들』, 『독립운동사대사전』 등을 저술하였다. 90살이 되던 1994년에는 자서전 『민족해방운동과 나』를 출간하였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광복회장을 역임하였고, 1992년부터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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