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진
尹河振1895. 1. 5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광제청년단
- · 광복군총영
- · 변론자치회
- · 정의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5년 1월 5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광평면(廣坪面) 하광동(下廣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윤학승(尹學昇)과 한자를 달리한 윤하진(尹河震)을 썼다. 형 윤하범(尹河範)과 동생 윤학소(尹學昭)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당시 의주군에서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유여대(劉如大) 목사의 주도 하에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의주군 광평면 만세시위에서 동지들과 함께 시위를 이끌었다. 만세시위 이후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하고 독립운동을 실천하기 위하여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西間島) 콴뎬현(寬甸縣)으로 이동하였다. 콴뎬현 토성자(土城子)에서 고향 선배들인 오동진(吳東振)·장철호(張喆鎬)·장덕진(張德震) 등과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을 조직하였다. 광제청년단은 국내의 청년단과 연계하거나 국내에 지단(支團)을 설치하여 한국 내 정보를 수집하고 만주의 단체들과 협력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11월 광제청년단은 콴뎬현과 접해 있는 안둥현(安東縣)에 근거지를 가진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과 논의하여 국내외 청년단을 연합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를 성립시켰다. 그 해 12월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이 조직되자 총영장에 선임된 오동진을 따라 총영원이 되었다. 이 무렵 형인 윤하범이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청성진주재소 소속의 한국인 순사 두 명의 공격을 받고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1920년 (음)8월, 네 명의 동지를 대동하고 국내로 진입하여 형을 사망하게 한 한국인 순사들을 처단하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후 국내의 친일파들을 처단하고자 유격대를 편성하여 친일관리인 의주군 옥상면장(玉尙面長) 김인서(金麟書), 옥상면 당목동(堂木洞)의 이준형(李俊炯)을 처단하였다. 1921년 (음)4월 형의 복수를 방해한 밀정 윤창룡(尹昌龍)을 처단하기 위해 장치환(張志煥)·조태환(趙泰煥) 등 두 명의 동지와 압록강을 넘었다. 4월 21일 동지들과 광평면 상광동(上廣洞)으로 가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밤 11시경 윤창룡의 집으로 진입하여 처단하였다. 작전을 끝낸 뒤, 인근의 동지 백봉즙(白鳳楫)의 집에 은신해 있던 중, 청성진주재소 일제 경찰 3명과 교전하고 탈출하였다. 이후 친일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여 본부로 돌아왔다. 1921년 음력 5월 하순, 불과 한 달 만에 재차 유격대를 구성하여 국내로 진입하였다. 5월 21일 의주군 옥상면의 부호 윤재하(尹載夏)·김백경(金伯卿)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2년 1월, 남만주에 근거지를 가진 독립운동 단체들이 통합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그해 8월에는 범위를 확대해 17개 단체가 통합한 결성되었다. 이 때, 광복군총영 또한 대한통의부로 통합되었다. 1924년 재차 통합운동이 전개되어 정의부(正義府)가 출범하였다. 이 무렵 잡륜자치회(卡倫自治會) 대표로 정의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후 잡륜(卡倫) 지역에서 한인사회를 이끌었으며, 친일 부호를 상대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같은 활동을 벌이다 1926년 9월 13일 창춘(長春)에서 윤학소·백봉즙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9년 9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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