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한
尹炳漢1892. 5. 7 ~ 1954. 3. 2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4)
관련 사건
- · 만승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4) 1892년 5월 7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목면(木面) 화양리(華陽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병세(炳世)를 사용하였다. 1919년 4월 정산면(定山面) 정산시장에서의 만세시위와 뒤이어 발생한 권흥규의 운구 중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정산면의 만세운동은 백곡리(白谷里)의 홍범섭(洪梵燮)·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 유림의 주도로 시작된 1차 시위와 권흥규(權興圭)의 사망이 계기가 되어 그의 시신 운구과정에서 목면까지 연장되어 전개된 제2차 만세시위로 구분된다. 정산시장의 장날인 1919년 4월 5일 오후 홍범섭 등은 서정리(西亭里)의 정산시장으로 나가 주민들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시장의 북쪽에 대기하고 있던 일제 헌병이 즉각 출동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한 홍범섭 등 30여 명을 붙잡아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하였다. 그러나 만세시위는 해산되지 않았고, 일제 경찰의 무자비한 만세시위 주도자 체포 과정을 목격하고 분노한 주민들이 시위에 동참하면서 시위대는 오히려 7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헌병분견소로 달려가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연행된 홍범섭 등을 대신하여 선두에서 시위를 이끌던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直員) 권흥규가 일제 헌병의 발포로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다음날인 4월 6일 아침 사망한 권흥규의 시신 운구행렬이 시작되었다. 권흥규의 친인척 및 전날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헌병주재소로부터 권흥규의 시신을 인수하여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고 쓴 명정(銘旌)을 선두에 내세우고, 고인의 자택이 있는 목면 안심리(安心里)로 향하였다. 권흥규 사망 소식을 들은 길목의 각 마을의 주민들은 마을마다 노제를 올리고 통곡하며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다. 운구행렬이 화양리를 지날 때 노제에 참석한 후, 마을 주민들과 함께 권흥규의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다. 안심리로 향하는 통곡의 행렬 속에서 어느 순간 ‘대한독립만세’의 절규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운구행렬은 만세시위대와 구분할 수 없게 되었고, 그 규모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졌다. 이에 대응하여 일제는 공주(公州)의 헌병대를 안심리 방면으로 급파했는데, 이들은 운구행렬과 마주치자마자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다. 이로 인해 권흥규의 조카딸과 명정을 쓴 권영진(權寧鎭) 등 여러 사람이 전날에 이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날의 운구 및 만세시위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이후 일제 헌병에 붙잡혔다. 청양헌병분견소에서 진행된 조사 과정에서 권흥규의 시신 운구와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이 인정되어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1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의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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