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윤
柳冀允1892. 6. 17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8)
관련 사건
- · 1919년 개성군 상도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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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8) 1892년 6월 17일 경기도 개성군(開城郡) 상도면(上道面) 풍천리(楓川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그 해 4월 1일 개성군 상도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해서 평양(平壤)·안주(安州)·의주(義州)·선천(宣川)·원산(元山)·진남포(鎭南浦)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시위를 주도한 천도교·개신교·불교계 대표와 학생 대표들은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추진하기 위해서 인편을 통해서 운동을 전국 각 지역으로 전파하였다. 개성군의 만세시위는 독립선언서와 운동소식을 전달받은 개신교와 학생대표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3월 4일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好壽敦女子高等普通學校)와 송도고등보통학교(松都高等普通學校)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된 것을 시작으로 계속적으로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3월 27일 개성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철시 투쟁도 전개되었고 만세시위는 개성군 일대로 확대되어 갔다. 3월 28~31일 동면(東面) 대조족리(大鳥足里)에 사는 장규한(張奎漢)·고덕찬(高德燦) 등이 동네 사람들과 함께 오관산(五冠山)으로 올라가서 횃불과 봉화를 이용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특히 3월 30일 장규한과 고덕찬은 횃불시위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와서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불렀으며, 3월 31일에는 인근 백전리(白田里)·탄동리(炭洞里) 주민들도 합세하였다. 시위대는 면사무소로 이동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제 군경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4월 1일 상도면 연동리(蓮洞里)와 풍천리(楓川里)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때 이기춘(李起春)·신선명(申善明)·장경범(張京範)·장태수(張台秀)·김순흥(金順興)과 함께 상도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대를 이끌고 상도면 상도리에서 출발해서 대성면(大聖面) 풍덕리(豊德里)로 행진을 하였다. 풍덕리에 이르러서는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헌병분견소를 포위하였다. 일제 헌병이 개성 헌병대 본부로 전화를 하자, 추가 병력의 파견에 따른 시위대 해산과 연행을 우려한 시위대는 개성과 풍덕리를 연결하는 전화선 전주(電柱)에 해당하는 광덕리(光德里)의 제151호, 제152호와 대성면 신죽리(新竹里)에 있는 제169호의 전주를 넘어뜨리고 전화선을 절단하였다.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하였으며, 시위대는 헌병대를 습격하고자 했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일제 군경에 의해서 4월 1일 상도면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붙잡혀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전신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한 결과, 같은 해 7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을 취소하고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본인의 행동은 “ 선민족으로서 정의와 인도에 기초한 행위임으로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상고하였다.하지만 결국 그해 10월 1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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