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문
吳德文1886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김운선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2017)
관련 사건
- · 후기의병(김운선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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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7) 충청북도 청풍군(淸風郡) 근남면(近南面) 수산동(水山洞, 현 제천시 수산면 수산리)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09년 당시 24세로, 1886년생으로 추정된다.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김운선(金雲仙)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대한제국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의 체결로 한국의 내정까지 침범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한국 군대가 해산되자 일제의 국권 침탈 행위에 분노하는 전국 각지의 애국 지사들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의병 봉기하여 일본군과 맞서는 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09년에 이르러 의병활동은 더욱 왕성하게 발전되었다. 이러한 때 김운선 의병장의 부하가 되어 의병에 투신하였다. 김운선 의병장은 강원도 원주군(原州郡) 출신이었고, 1907년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의 중군 선봉으로서 활동하다가 이후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인솔하여 1908년 10월부터 1909년 4월 사이에 강원도 원주군, 충청북도 충주군(忠州郡) 경상북도 순흥군(順興郡, 현 영주시 순흥면), 영천군(榮川郡, 현 영주시)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렬한 교전을 전개하던 의병장이었다. 김운선 의병부대에 소속되어 일본군과 교전하고, 군자금 및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2월 김운선 의병장을 따라 순흥군 봉양면(鳳陽面) 소천동(韶川洞, 현 영주시 부석면 소천리) 시장에서 금전과 잡품 여러 건 등 군자금 및 군수품을 모집하던 중에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1909년 3월 31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도죄·강도죄로 징역 10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6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 해 5월 26일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여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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