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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贊玉

贊玉

1916. 10. 4 ~ 1946.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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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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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羅州)학생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나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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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나주농업보습학교
  • · 나주노동조합

포상 정보

  • · 애족장(2001)

관련 사건

  • · 광주학생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1) 1916년 10월 4일 전라남도 나주군(羅州郡) 문평면(文平面) 국동리(國洞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유대욱(柳大旭)이다. 나주농업보습학교(羅州農業補習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당시 나주에서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1929년 11월 11일 신간회(新幹會) 나주지회(羅州支會) 사무소 뒤편에서 나주청년동맹 검사위원장 박공근(朴恭根)과 만나 광주학생운동으로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시위운동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협의하였다. 11월 13~14일 나주군 나주면 북문정(北門町, 현 나주시 성북동) 박준삼(朴準三)의 정미소에서 박공근을 비롯하여 신간회와 나주청년동맹에서 활동하던 박동희(朴東熙)·양영택(梁永澤),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 홍민후(洪敏厚)와 만나 11월 17일 장날을 기해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시위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11월 14일 박준삼의 정미소에서 동지들과 만나 시위 계획을 연기하였다. 나주농업보습학교에서 11월 17일부터 5~6일간 농번기 임시휴교를 시행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11월 25일 나주군 나주면 남문정(南門町, 현 나주시 남내동) 박공근의 집에서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 이창신(李昌信)·이채후(李采厚)·김성남(金成南)과 나주보통학교 학생 이성환(李性煥)·원복준(元福準)과 만났다. 11월 27일 장날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계획을 세웠다. 「대중이여! 학생 제군이여-알고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격문 원고를 작성하여 1929년 11월 26일 박공근의 집에서 동지들과 만났다. 격문은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일제의 조치를 비판하고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식민지 탄압정치 절대 반대,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권 획득, 관료적 교관 배격,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 실시, 치안유지법 절대 반대” 등 구호가 포함되었다. 박공근·이창신과 함께 인쇄 기구와 재료를 조달하여 격문 약 2,000장을 제작하였다. 11월 27일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 학생 약 180명을 이끌고 나주면 남문정과 본정(本町, 현 나주시 중앙동), 나주군청을 거쳐 나주시장으로 이동하면서 격문을 배포하였고, 나주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나주군 나주면 과원정(果院町, 현 나주시 과원동) 방면으로 행진하며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29년 12월 11일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검사국 조사 후 예심(豫審)에 회부되었다. 1930년 2월 7일 예심 종결 후 재판에 넘겨졌다. 같은 해 2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시작되었고 검사는 징역 10월을 구형하였다. 그 해 3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0월(미결구류일수 중 5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30년 4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동일한 형을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30년 7월 10일 대구 조선은행 폭탄 투척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있던 장진홍(張鎭弘)이 자결하자 수형인 1,300여 명이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감방문을 파괴하고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김기용(金基用)·조은석(趙銀石)·박덕룡(朴德龍)·김선기(金善基)·윤장혁(尹章赫)과 함께 재판을 받게 되었다. 1930년 9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손치은(孫致銀)·김완섭(金完燮) 변호사가 변론을 담당하였다. 재판장은 치안유지법 사건이므로 비공개 재판을 진행하겠다고 하였다. 변호인들은 감방문을 파괴한 사안이 치안유지법 위반이 될 수 없다며 항의하였고 피고들의 가족들이라도 방청할 수 있게 하라고 요구하였다. 공판은 피고의 가족들에게만 방청이 허락되었고 일반에는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검사가 징역 1년을 구형하였고, 징역 8월을 받았다. 1931년 8월 20일 만기 출옥하였다. 이후 박세공(朴世共)·이항발(李恒發)·손동출(孫東出) 등과 함께 나주노동조합(羅州勞動組合)을 조직하였다. 나주노동조합에서는 나주 학교(鶴橋) 공사 노동자 임금 인상을 추진하였고 세금 불납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나주 경현리(景賢里, 현 나주시 경현동)에서 농민야학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1932년 11월 4일 나주군 공산면(公山面) 동촌리(東村里)에서 전남노동협의회 재건운동 사건으로 광주경찰서에 붙잡혀 전남경찰부로 압송되었다. 1933년 2월 23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같은 해 3월 6일 기소 유예로 풀려났다. 그 해 10월 29일 박동희와 함께 전남경찰부와 나주경찰서 경찰에 붙잡혔다가 12월 21일 풀려났다. 1944년에는 이른바 조선임시보안령(朝鮮臨時保安令) 위반으로 대전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조사를 받은 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광복 이후,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나주 대표로 참석하였다. 1946년 5월 16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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