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光福
光福1891. 11. 20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군사주비단
- · 공평사
- · 한인애국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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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5) 1891년 11월 20일 황해도 금천(金川)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명옥(李溟玉)·이용택(李用澤)·최영심(崔英心)·장시옥(張時玉) 등이다. 1911년부터 윤치호(尹致昊)가 설립한 개성의 한영서원(韓英書院)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동안 기독교를 수용하였다. 동향 출신의 이정숙(李貞淑)과 결혼하여 아들 이효상(李孝相)을 낳았다. 1914년 한영서원 교사 신영순(申永淳) 등이 반일 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창가집을 편찬·배포하였다가 22명의 교사 및 학생이 체포된 이른바 ‘한영서원 애국창가집 사건’에 연루되어 퇴학당하였다. 1918년부터 해주잠업 강습소를 다녔고, 1919년 졸업 후 1920년까지 춘잠지도원(春蠶指導員)으로 종사하였다. 1919년 황해도 수안군청(遂安郡廳)에 근무하던 중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 4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신원 정의도(丁義道)를 만났다. 당시 평산(平山)에 거주하던 정의도로부터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신한청년』등 신문과 잡지를 빌려 읽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정의도의 소개로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에 가입하였다.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활동하면서 금천 일대에서 『독립신문』·『신한청년』 등의 배포에 힘썼다. 그리고 자신이 일하는 호현면(好賢面)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일제 기관에서 근무하는 한인 관리들에게 퇴직을 종용하는 경고문 약 200장을 등사하여 배포하였다. 1920년 1월 나석주(羅錫疇)·손재흥(孫在興)·김덕영(金德永) 등과 독립운동 동지를 밀고한 이수영(李壽永)·오의제(吳義濟)·김학범(金學範) 3인을 처단하였다. 1920년 8월 정의도가 체포되고, 주비단에 대한 검거에 직면하여 만주로 탈출하여 지린(吉林)에 은거하였다. 1921년 1월 상순경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건너가, 프랑스조계 샤페로(霞飛路)에 위치한 대한교민단 양헌(梁瀗) 단장을 찾아가,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보호를 요청하였다. 이후 임시정부가 운영하던 무료진료소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1922년까지 상하이 적십자사에서 활동하다가 1923년부터 1924년까지 수저우공업전문학사(蘇州工業專門學社)에서 공업 기술을 배웠다. 1925년 7월 학업을 마친 후 상하이로 돌아왔다. 박창세(朴昌世)와 최승봉(崔昇鳳)의 추천으로 상하이전차공사의 검표원으로 취직하였다. 검표원 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자, 가족을 상하이로 불러들였다. 1926년 강경선(康景善)의 권유로 대한교민단에서 단비 징수 사무를 담당하였다. 1933년에는 교민단 의사원에 선임되었고, 교민단이 개최하는 3·1절 기념식, 국치기념일, 개천절 등 기념일 행사에 적극 참여하면서 독립사상의 선전과 고양에 힘썼다. 1930년 흥사단에 가입하여 원동위원부 제3반 반장을 역임하였다. 아울러 흥사단의 연회와 매월 첫 번째 토요일 위원부에서 열리는 월례회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31년 흥사단에서 설립한 공평사(公平社)의 조장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1월 엄항섭(嚴恒燮)과 공평사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상하이 인성학교(仁成學校)에 대한 지원 활동에도 참여하여 인성학교 유지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한진교(韓鎭敎) 등과 주로 학교의 유지·운영에 관한 재무 업무를 관장하였다. 1934년 1월 김구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군관학교 입교생 모집원으로 활동하였다. 상하이에서 한인 청년을 모집하여 중국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의 한인특별반에 입교시켰다. 전봉남(全奉南)·이재천(李在天)·신성봉(申聖鳳)·추원규(秋元奎) 등이 그들로, 프랑스 조계 라페이더로(辣飛德路) 제성당(諸聖堂)이라는 성공회 예배당에서 신성봉과 추원규를 설득하여 입교 승낙을 받고, 난징(南京)의 염온동(廉溫東)이 보내온 여비를 지급하여 뤄양분교에 입교시켰다. 1934년 2월 말 김구를 돕기 위해 전차 회사를 사직하고 난징으로 갔다가 상하이로 돌아와 만년필 행상 및 인삼 행상을 하면서 군관학교 입교생을 모집하던 중, 1935년 3월 26일 마랑로(馬浪路) 셰청리(協成里) 3호 집에서 프랑스조계 경찰에 붙잡혀 일본영사관에 인도되었다. 부인 이정숙은 다방면으로 남편의 구명운동에 나서, 임시정부와 교민단에 알리는 한편 상하이 변호사노동조합의 로윈메이(樓允梅)·쉬졔(徐傑) 등 중국인 변호사에게 사건을 의뢰하였다. 국내 언론도 “기미년(己未年) ○○운동 소요 당시 황해도 금천군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부호(富豪) 2명을 총살하고 상해 방면으로 피신”하였던 ‘기미년 OO운동의 거두’ 혹은 ‘상해의경대(上海義警隊)의 거두’로 지칭하면서 연일 보도하였다. 부인과 한인 사회의 적극적인 구명 운동에도 불구하고 국내로 압송되어, 황해도 경찰부에서 조사를 받은 다음 1935년 6월 25일 금천경찰서로 압송되었다. 1936년 5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살인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항소하였으나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3년으로 감형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었다. 1936년 9월 1일 서울의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10년 가까이 옥고를 겪었다. 1944년 9월 가출옥으로 풀려나 고향인 황해도 금천으로 돌아갔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모든 우리 동포 자손들에게 한 마디 남기노니, 광복 완성 후에 이명옥 일가를 위하여 충렬문을 수안 고향에 세워 영구히 기념케 하기를 부탁하여 두노라.”라고 그를 기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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