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奎甲
奎甲1888. 11. 5 ~ 1970. 3.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상해한인청년회
- · 임시정부
- · 임시의정원
- · 삼일학교
- · 신간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3.1운동
- · 한성정부 수립
-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 신간회 설립대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88년 11월 5일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9세손인 이도희(李道熙)와 박안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원서(元瑞), 호는 운호(雲湖)이다. 부친 이도희는 전라남도 화순(和順)에서 군수를 지냈고, 형 이규풍(李奎豊)은 무과에 급제하여 대한제국 무관으로 복무하다가 1907년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다.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가을부터 북감리회 선교부에서 운영하였던 공주 영명여학교 한문 교사로 근무하였다. 이 무렵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1912년 봄 북감리회 선교사 샤프 부인(Mrs. Sharp)과 이화학당 당장(堂長) 프라이(Lulu Emma Frey)의 중매로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한 이심숙(李心淑)과 결혼하였다. 1913년 4월 2일 영명여학교 교감으로 제1회 졸업식 행사를 주관하였고, 1917년 5월 부인과 함께 공주에서 여자야학교를 설립하여 부인은 교사를, 자신은 교감을 맡아 3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8년 신홍식(申洪植) 목사가 담임하던 평양 남산현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목회하다가, 1919년 2월 19일 신홍식 목사와 함께 서울에 올라와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신홍식 목사는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구속되었다. 이어 한남수(韓南洙)·홍면희(洪冕禧)·김사국(金思國)·이민태(李敏台)·민강(閔橿) 등과 비밀독립운동본부를 조직하고 독립운동 참여 권유와 부상자 위문 및 후속 대책을 수립하였다. 1919년 3월 초순 이민태의 집에 숨어 있던 중, 이교헌(李敎憲)·윤이병(尹履炳)·윤용주(尹龍周)·최전구(崔銓九)·이용규(李容珪)·김규(金奎) 등 유림계 동지들이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제의하자, 비밀독립운동본부 동지들과 의논하여 준비위원회를 열기로 하였다. 홍면희의 교섭으로 현직 검사인 한성오(韓聖五)의 집에서 3월 17일 유림계 동지들과 모여 임시정부 약법 제정, 각원 및 13도 대표 선출을 하고,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이를 선포키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4월 2일 인천 모임에 서울·경기 지역 대표들만 일부 참석하였고, 한남수가 파리강화회의 상황과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여부를 조사한 다음에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다시 모여 상의하기로 하였다. 4월 4일 한남수에게 상하이에 가서 상황을 알아본 뒤, 암호 전보로 통지해 줄 것을 부탁하며 여비 300원을 주었다. 한남수는 4월 8일 출발하여 16일 상하이에 도착하였으나 밀정으로 오해를 받아 21일에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전보를 보내왔다. 한편, 학생층을 포섭하여 국민대회를 준비하며 한남수의 전보를 기다렸으나 전보가 늦어지자, 자신이 맡고 있던 국민대회 개최와 지방조직, 운동자금 모집 등을 현석칠(玄錫七) 목사에게 맡기고 4월 중순 홍면희와 서울을 떠나 4월 20일경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임시의정원에서 이른바 ‘한성임시정부’ 조직 선포문과 각원 선정을 인정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상해한인청년회(上海韓人靑年會)에 참여하였고, 5월 4일 청년회와 청년단이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으로 통합되면서 서무부장 겸 서무부 비밀부원에 선임되었다. 1919년 7월 안창호(安昌浩)의 권유로 임시의정원 제5회 회의부터 충청도 의원으로 참여하는 한편, 대한적십자회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0년 11월 삼일학교(三一學校) 강사로 활동하였고, 이후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운랍간(雲拉間)으로 이동하여 한인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시키던 형 이규풍을 지원하였다. 부인 이심숙은 이애라(李愛羅)로 개명하고 국내에 남아 독립운동을 하다가 남편을 만나러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가 1921년 9월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192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여 기독교 선교와 교육사업에 종사하던 중, 1925년 교사로 부임해 온 이화여전 출신 김애라(金愛羅)와 재혼하였다. 1926년 3월 1일 김영학(金永學)·유찬희(柳燦熙)·이제(李濟)·오성묵(吳成默) 등과 3·1운동 제8주년 기념식을 주최하였다. 1927년 무렵 가족과 귀국하여 서울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1929년 6월 16일 신간회(新幹會) 경동지회 설립대회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임된 데 이어 지회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제3회 정기대회에서 검사위원에 선임된 이후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소될 때까지 경동지회 간부로 참여하였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기독교조선감리회 돈암리구역을, 1932년부터 1934년까지는 도화동구역을 담임하였고, 1934년 광희문구역 담임자가 되었다. 1935년부터 동부연회 의정부교회 담임하다가 1943년 8월 감리교단 특별총회에서 경기교구장으로 선임되었으나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승인하지 않아 실제 활동은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김승태⋮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