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廉宅訥

訥

1850. 1. 28 ~ 1929.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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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廉宅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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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단천(端川)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단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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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독립군비단
  • ·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0) 1850년 1월 28일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복귀면(福貴面) 용강리(龍岡里, 현 함경남도 단천시 용흥리)에서 아버지 염우덕(廉隅德)과 어머니 선산(善山) 김씨(金氏) 사이의 3남 2녀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주(坡州)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단천군 일대에서 어느 정도 명망(名望)있는 지역 유지(有志), 유림(儒林)의 일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신임 단천군수 현승규(玄昇奎)가 일진회(一進會)의 무고와 관찰사의 포폄(褒貶)에 낮은 고과(考課)를 받아 해임 위기에 처하자 1907년 2월 그의 유임을 청하는 청원서를 올릴 때 단천군민을 대표해서 최경집(崔敬集) 등과 함께 발신자의 한 명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1910년 3월에는 단천군 향교(鄕校)의 직원(直員)으로 임명되었다. 직원(直員)이라는 직위는 1895년 갑오개혁으로 신식 학부관제가 실시된 이후 사실상 겨우 향사(享祀)의 기능 정도만 유지되온 성균관(成均館) · 향교의 직제를 1908년 완전히 개편하면서 새로 만들어진 직임이다. 즉 1908년 10월 29일 「성균관관제(成均館官制)」를 개정하면서 10조에 각 부군(府郡)의 향교에 직원 1인을 두어 향교를 수직(守直)하도록 했는데 그 자격은 해당 군의 유림중에서 선임하도록 하였다. 단천군 향교 직원으로 임명된 후 1911년 1월까지는 공립단천보통학교(公立端川普通學校)의 학무위원촉탁(學務委員囑託)을 역임하는 등 주로 교육계에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지역의 유지로 활동하던 중 1919년 만세운동을 계기로 70세의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교통사무국(交通事務局)의 함경남도 단천군 지국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당시 이 지역 인근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단원(團員)은 김택률(金澤律)로, 그는 1920년 7월 이후 다른 단원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여러 차례 함경북도 길주(吉州)·성진(城津)과 함경남도 단천·이원(利原)·북청(北靑)·풍산(豐山)·갑산(甲山) 등지를 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활동 결과 많은 단원을 확보했고, 최봉수(崔鳳洙) 등 6명으로부터 군자금 55원을 모집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다시 갑산·풍산·단천·북청 각 군에서 강이율(姜理律) 외 12명으로부터 317원을 모집하고 이기반(李基磻) 외 9명으로부터 6,200여 원, 김병규(金秉)에게 300원의 출금 계약을 맺었다. 그러다가 1921년 3월 18일 단천군 수하면(水下面) 중평리(仲坪里), 이중면(利中面) 하전리(荷田里)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단천경찰서 소속 경관과 교전하여 일제 경찰에게 부상을 입히고 도주하였다가 붙잡혔다. 붙잡힌 김택률에 대한 일제의 심문결과 같은 단원 6명과 함께 군자금 13,350원의 출금 계약을 하였던 사실, 단원으로 활동했음이 밝혀져 다른 46명의 단원과 함께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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