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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호

延秉昊

1894. 11. 22 ~ 1963.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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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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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槐山)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괴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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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민국청년외교단
  • · 대한정의단군정서
  • · 신민부
  • · 한국혁명당
  • · 신한독립당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4년 11월 22일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도안면(道安面) 석곡리(石谷里)에서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곡산, 초명은 병학(秉學), 호는 원명(圓明)이다. 북간도에서 해관(海關) 일을 보던 형 연병환(延秉煥)의 영향으로 1913년 소학교 과정인 중명학교를 마치고 롱징(龍井)으로 건너가 중학 과정인 창동학원을 다녔다. 1년 남짓 만에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5년 서울에서 경성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를 1년 정도 다녔다. 이때 교육부 간사를 맡고 있던 안재홍(安在鴻)을 만났고, 조소앙(趙素昻)의 동생인 조용주(趙鏞周)와도 친교를 맺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가 수립될 무렵 조소앙·조용주와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비밀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을 결성하였다. 청년외교단은 단장을 두지 않고 총무 책임체제로 운영되었는데, 조용주와 함께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은 서울에 중앙부를 설치하고 국내에는 대전·회령(會寧)·충주(忠州) 등지에 지부를 두고 상하이에 해외 지부를 설치하였다. 다른 국내 단체와 달리 국내 지부가 발달하지 못했는데, 대전과 충주에 지부를 두었던 데에 기여하였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의 비밀행정 국내조직인 연통제 역할을 담당했는데, 주요 임무는 국내의 정보 제공 및 통신과 인적·물적 자원 확보에 있었다. 연통제는 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지에서 활발했지만,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거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때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 지부를 통해 중부 이남 지역에서 연통제 역할을 대행하였다. 그리고 독립전쟁에 대비한 적십자회를 설치하는 한편 1919년 9월 국내 비밀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배달청년당(倍達靑年黨)으로 개편을 추진해 나갔다. 이러한 통합 움직임은 당시 상하이와 연해주의 임시정부가 통합되면서 독립운동이 고조되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추진되었으며 국내의 비밀단체를 묶어 배달청년당으로 발전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 해 11월 말 청년외교단의 조직이 발각되면서 배달청년당 계획은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청년외교단 조직이 정비되자 만주로 떠났고, 이때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을 연계하는 임무를 맡았다. 1919년 말 북간도 안투현(安圖縣)에 근거지를 둔 대한정의단군정서에 합류해 그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이 단체는 임시정부와 연계를 가지면서 1919년 말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 무렵 안투현 하수산(何須山)에 근거지를 둔 대한독립광복단(大韓獨立光復團)에서 산포대장을 맡은 사실도 확인된다. 구체적 활동상은 알려지지 않으나, ‘권총과 소총을 휴대하고 있다’는 일제 첩보 자료가 있다. 1920년 3월 30일에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에 「독립기념일의 말」이란 글을 게재하였다. “말로만 독립을 선언하지 말고, 반드시 삼천리강산에서 일제를 구축해 자유를 찾자”, “영웅적 사심을 버리고, 조국 광복을 위해 온몸을 바치자”, “임시정부가 무엇을 할까 바라기 보다는 힘 있는 임시정부를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이자”, “남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내 힘으로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 등, 독립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었다. 같은 해 청년외교단 활동과 관련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서, 1922년 3월 10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같은 충청도 출신인 민충식(閔忠植)과 ‘신도(新到)의원’으로 회의에 참석하여 당시 한인 사회의 대동단결을 호소하면서 청년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22년 4월 15일 조소앙 등과 한인의 대동단결 및 민족의식 고취를 표방하며 세계한인동맹회를 조직하여 동맹회의 주무를 맡았다. 1922년 6·7월 유호청년회(留滬靑年會)를 발기하여, 조사위원에 선출되었다. 7월 1일 의정원 회의장에서 80여 명이 모여 시국 해결을 위한 회의가 열렸을 때 조소앙·조상섭(曺相燮) 등과 의정원 의원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1922년 7월 12일 세계한인동맹회를 비롯하여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유호청년임시대회, 화동한국연합회시국책진회 등이 결성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에 참가하였다. 시사책진회는 안창호가 회장을 맡았고, 여운형(呂運亨)·김용철(金容喆)·신익희(申翼熙) 등이 간사를 맡으며 구성되었다. 이때 34명의 서명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나 7월 28일 탈퇴하였다. 그 해 8월에는 국민대표회의를 반대하는 선언서 배포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 소집이 대세를 이루자, 베이징(北京)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1923~1925년에는 베이징에서 대학을 다니는 한편, 중국 인사들과 교류를 넓혀 나갔다. 1925년에는 한·중 연합단체인 동서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25년 이승만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고, 2대 대통령으로 박은식(朴殷植)을 선출하자, 대통령 선출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1925년 5월 31일 이천민(李天民)·박숭병(朴崇秉)과 연명으로 ‘교정서’를 발표하였다. 1925년 말 만주로 건너가 신민부(新民府)에 참가했는데, 중국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관계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국제공산당 조직으로부터 군자금을 받아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국 군벌 펑위샹(馮玉祥)의 책사로 활동하던 이완(李俒)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국제공산당과 교섭한 결과, 5만원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1926년 2월 1차로 받아온 3천원을 신민부에 전달하여 동닝현(東寧縣)에 소재한 군사강습소의 운영자금으로 사용하였다. 1929년 무렵 난징(南京)으로 옮겼으며, 1930년 8월 25일 중국 항저우(杭州)의 중국국민당 저장성(浙江省)집행위원회의 초청으로 ‘한국독립운동의 전후 개황’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30년 8월 29~30일 난징 『중앙일보』에 “혁명이란 하루아침에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끊임없는 투쟁이 이어져야 하고, 이를 위해 광대한 민중이 혁명의 기본 역량이 되어야 한다. “국외 방면에서는 상해의 혁명정부가 전체 한국혁명을 총지휘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혁명활동의 핵심적 역할은 독립당이 맡고 있다. 독립당의 조직은 민주집권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민족독립, 민주건국, 경제평등 등을 종지로 삼고 있다.”, “혁명운동은 대중에 파고들어야 하고, 민중을 훈련시키고 민중을 향한 선전활동을 적극 전개하며, 민중을 조직하여 혁명무력의 근간으로 삼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국제사회의 혁명동지들과 연계를 강화해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공동 분투해야 할 것이다.”라고,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중추임을 강조했고, 혁명의 주체로서 민중을 중시하였으며,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어 1932년 초, 한국혁명당 결성에 참가했는데, 신익희 주도로 상하이 한국독립당과는 거리를 두고 활동하였다. 1932년 이후 한국광복동지회(韓國光復同志會)·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열단(毅烈團)·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등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을 추진해 나가는 상황에서 1934년 2월 재만 한국독립당과 합당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으로 통합하였다. 당수에는 홍진, 상무위원에는 김상덕(金尙德)·신익희·윤기섭(尹基燮) 등이 선임되었으며, 이때 선전위원장을 맡아 상무위원과 집행위원을 겸하다가 제2차 중앙위원회에서 정무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1933년 9월 충청도 의원으로 다시 임시의정원에 합류하였다. 임시의정원을 떠난 지 10여 년만의 일이었다. 당시 임시의정원 활동은 1935년 10월 전장(鎭江)시기까지 이어졌다. 이 무렵 신한독립당을 통해 당시 전개되던 대당조직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대당조직운동이란 독립운동 정당이 각기 분립하고 있던 것을 하나로 통합해 민족대당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1935년 7월 신한독립당을 포함해 5개의 정당과 단체가 통일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민족혁명당의 통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통합’의 명분 아래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상황에서, 1936년 3월 한국국민당에도 적(籍)을 두었지만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1936년 6월 『독립공론』의 주간을 맡았는데 『독립공론』의 논조가 문제가 되어 김구 계열의 청년들과 갈등을 맺기도 하였다. 이후 일본의 대륙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난징에서 상하이로 옮겼다가, 1937년 1월 7일 일제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적색운동의 거두’라는 이유로 징역 8년의 옥고를 겪다가 1944년 10월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장석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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