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영
吳哉泳1897. 5. 24 ~ 1948. 8. 3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구세단
- · 전조선청년회연합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서울 만세운동
- · 부산경찰서 투탄사건(박재혁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7년 5월 24일 경상남도 동래부(東萊府) 북면(北面) 주례리(周禮里, 현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에서 아버지 오직선(吳直善)과 어머니 김순임(金順任)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고, 유년기에 좌천동(佐川洞)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이명으로는 오택(吳澤)·오준영(吳晙泳)을 사용하였고, 호는 북성(北星) 혹은 만춘(晩春)이라 하였다. 1912년 3월 사립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졸업하고 부산공립상업학교(釜山公立商業學校, 후일 부산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하여 1915년 3월에 졸업하였다. 1913년 김정수(金貞守)와 결혼하였다. 상업학교 재학 때 의형제를 맺었던 박재혁(朴載赫)·최천택(崔天澤)을 비롯한 14명의의 다른 동창생 친우들과 뜻을 모아 1915년에 비밀결사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고, 김인태(金仁泰, 이명 金鐵城)와 함께 재정을 맡았다. 매월 한 차례씩 등사판으로 단보(團報)를 내고 자체 수양회를 여는 등 비밀리에 활동을 펼치다가 반년 만에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이때 박재혁·김인태·박흥규(朴興奎) 3인과 함께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며 조사를 받다가 구세단 해산을 조건부로 석방되었다. 그 후 미국유학을 꿈꾸었으나 좌절되자 부산에서 인삼 판매점을 경영하였다. 1919년 2월 초순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있다가 당시 일시 귀국한 김인태로부터 세계 정세와 독립운동 전망을 듣고 서울로 올라와, 그 해 3월 1일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어 13도 대표들이 참여하는 한성정부(漢城政府) 수립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고, 이로 인해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인연을 맺었다. 같은 해 음력 9월에 지인 김두옥(金斗玉)이 김두현(金斗鉉)을 데리고 부산 자택으로 찾아와 독립운동 참여에 뜻을 밝히면서 자문을 구하자 고유문(告諭文) 10장과 임시정부가 발행한 찬의장(贊議狀) 2장을 교부하고 독립운동 활동방법을 일러주었다. 1920년 9월 7일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의 명령으로 폭탄거사를 실행키 위해 밀입국한 동지 박재혁이 찾아와 폭탄 한 개를 맡기자 이를 받아서 집 천장에 감춰주고는 박재혁의 거사계획을 귀띔 받았다. 이에 거사 일까지 부산 동래와 해운대(海雲臺) 등지에서 은신 정양할 수 있도록 1천원을 제공하였다. 9월 14일 다시 찾아온 박재혁은 폭탄을 되받아가서 곧장 부산경찰서로 들어간 후 폭탄을 던져 청사를 대파하고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 서장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로 인해 사건 당일에 최천택·김영주(金永柱) 등 5명과 함께 거사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았다. 3주일 후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나 거사 계획에 직접 가담한 증거가 나오지 않자 10월 16일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후 1921년 1월 18일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 창립대회에 부산청년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같은 해 5월 중순, 앞서 김두옥·김두현 등이 관련된 '제2차 독립운동계획' 사건의 관련자로 연루되어 경찰부·진주경찰서 합동수사대에 붙잡혔다. 이어 같은 해 5월 30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했으나 1921년 8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다가 1922년 6월 23일 가출옥 석방되었다. 출옥 이후 1922년 중국 펑톈(奉天)에서 발행된 『만주일보(滿洲日報)』 경남지사를 인수하였고, 1924년에는 『시대일보』 부산지국을 개설하고 경영하였다. 이어서 『조선일보』 부산지국도 인수하여 경영하면서 1925년 4월 서울 경운동(慶雲洞)의 천도교기념회관에서 열린 전조선 기자대회에 부산기자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후 1931년 서울로 이주하였고, 1941년 8월 김범부(金凡夫)·최천택·최윤동(崔胤東) 등 5명과 함께 경기도경찰부에 붙잡혀 일시 구금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정당통일기성회(政黨統一期成會) 조직, 『독립신문』 재창간, '박재혁의사추모회' 개최 및 집전(執奠)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1948년 8월 30일 병환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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