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화
吳敬和1862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권경대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15)
관련 사건
- · 후기의병(권경대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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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5) 충청북도 충주군(忠州郡) 노은현면(老隱峴面) 대방동(大防洞, 현 충주시 노은면 신효리)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08년 당시 47세로 1862년생으로 추정된다. 의병활동 전에는 채금업(採金業)에 종사하였다. 의병 활동을 시작하는 경위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08년 권경대(權景大) 의병부대에 소속하여 활동하였다.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늑약을 체결함으로써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켰다. 이어 1907년에는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의 체결로 한국의 내정까지 침범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러한 연속된 일제의 국권침탈 행위에 분노하는 애국지사들은 국권을 회복하기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대항하는 데에 나섰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아래 의병에 투신하였다. 1908년 5월부터 권경대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가 이화집(李化執)·권성삼(權聖三) 등 의병들과 함께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등지에서 군자금 및 군수품 모집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음)6월 권경대 의병장을 따라 합천군 숭산면(崇山面) 수전동(秀田洞, 현 가야면 일대)에서 현금 30원 등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음)8월에는 성주군 청파면(靑波面) 반수동(半首洞, 현 수륜면 일대)에서 한전(韓錢) 9관 300문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던 중에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1908년 9월 30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강도, 폭동으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08년 12월 21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여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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