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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根周

根周

1860. 2. 3 ~ 1910.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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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根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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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주(洪州)계몽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홍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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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홍주의병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60년 2월 3일 충청남도 홍주군(洪州郡, 현 홍성) 홍북면(洪北面) 중계리(中溪里)에서 아버지 이현복(李玄福)과 어머니 파평 윤씨(坡平) (尹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문약(文若), 호는 청광자(淸狂子)이다. 큰형은 이근하(李根夏), 작은형은 이근상(李根商)이다. 함경도 절도사를 지내고 청백리에 선정된 이제신(李濟臣)의 10세손이고,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충청도 관찰사와 병조판서를 지낸 이명준(李命俊)의 9세손이다. 1868년부터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주로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1881년 공부를 위해 몇 개월분의 양식을 가지고 충남 공주(公州)의 마곡사(麻谷寺) 부속 암자인 부용암(芙蓉庵, 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에 들어갔다. 부용암은 깊은 산중에 있어 양식 조달이 어려워 3일에 한 끼만 먹고 상투를 들보에 매어 밤낮으로 공부에만 매진하였다고 한다. 1882년 덕산사(德山寺), 1883년 예산의 용산(龍山, 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1884년 결성(結成)의 고산사(高山寺, 현 홍성군 결성면 무량리)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설(李偰)·김복한(金福漢)·홍건(洪健)·안병찬(安炳瓚)·송병직(宋秉稷)·이상린(李相麟) 등 지역 인사 및 홍주관찰사 이승우(李勝宇)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 해 12월 3일 주요 인사들이 인근 지역에서 모집한 의병들을 이끌고 홍주관아에 집결하여 김복한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거의하였다. 그러나 하루 만인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가 배신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의병부대의 지도부 23명이 구금되었고 이설·김복한·홍건·안병찬·송병직·이상린 6명은 서울로 압송되어 1896년 2월 23일 실형을 언도받았다. 동지들이 수감되자 자수하여 함께 투옥되고자 하였으나 두 형과 노모가 말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투옥된 인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서산과 태안 등지를 돌며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단발령이 철회되고 수감 중인 인사들이 석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단하였다. 1896년 청양(靑陽)에서 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조희현(趙羲顯)과 다시 창의(倡義)할 것을 계획하고 의병을 모집하던 중 조희현이 체포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굴욕을 당하고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깨끗하게 생애를 마치는 것이 당연히 가야할 길이다”라고 하면서 자결을 결심하였다. 같은 해 (음)9월 13일 큰형 이근하의 회갑연을 치르고, “삼천리 강토가 원수 오랑캐의 땅이 되고 500년 예의의 나라가 변하여 오랑캐 나라가 되었으며, 한 나라의 임금이 갑자기 이적(夷狄)의 신민이 되었습니다. 절조있는 선비로서 어찌 편안히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겠습니까. 이는 개 돼지와 같은 것이고 또한 매국한 무리들과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삶을 훔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자결의 뜻을 형제에게 밝혔다. 둘째형 이근상이 “큰 대신으로 자결하면 그 죽음이 명예롭지만 너는 일개 빈천한 선비에 지나지 않으니, 비록 죽더라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 그 죽음이 부질없지 않느냐”라고 하면서 말렸다. 그러자 “국모의 원수를 갚고 군부의 치욕을 씻지 못하였고, 물러나서는 집에서 수신(修身)하지 못하고 입신하여 뜻을 이룰 곳이 없으니, 이는 바로 뜻있는 선비가 인(仁)을 이룰 때입니다. 옛부터 절개를 세우는 자는 다만 죽을 수 있는 의리만 생각할 뿐입니다. 어찌 이름을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는 것에 따라 죽고 사는 것을 결정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국모의 원수와 임금의 치욕을 갚지 못해 죽음으로써 의리를 지킬 뿐이라고 강변하여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10년 9월 23일 덕산 낙상리 선영(先塋)으로 가 부모의 묘에 성묘하고 나서 묘소 주변에 ‘존화양이 척사부정(尊華攘夷) (斥邪扶正)’ 여덟 글자를 쓰고 칼로 목을 베어 자결 순절하였다. 자료에 따라서는 묘소 옆 소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는 설도 있다. 이때 수 편의 율시와 가족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겼으나 자결 사실을 접한 일제 경찰이 그날 밤 글과 유서를 모두 압수해 갔다. 이에 이근상이 1910년 12월 22일 동생의 유품을 돌려 달라는 내용의 탄원서까지 제출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자결한 후 김복한은 ‘취의성인(取義成仁, 의로움을 취하고 인을 이루었다)’, 안병찬은 ‘열혈의 마음으로 자결하여 우리의 백미(白眉)가 되었다’, 표우현(表右鉉)은 ‘나라가 망함에 사생취의(捨生取義, 죽음으로써 위를 취함) 하였다’고 하는 등 의로운 죽음을 추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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