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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根雨

根雨

1859. 3. 28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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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根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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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계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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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동우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9) 1859년 3월 28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말 관직에 올라 1893년 감찰, 1903년 관리서 주사, 1904년 통신사 전화과 주사, 경상남도관찰부 총순을 거치고 1905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1907년 6월 홍재칠(洪在七) 등 서울의 유지들과 다카하시 히사시(高橋久司) 등이 조직한 동우회(同友會)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한일 양국의 국조 숭경(國祖崇敬), 양국민의 정신적 화목, 교육·자선·식산(殖産) 발달”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회장은 이윤용(李允用)과 일본인 도우즈(到津公凞), 부회장은 이범규(李範圭)·윤이병(尹履炳)이었고, 서울 중서(中署) 중곡(中谷)에 사무소를 내고 서울 5부(五部)에 지부를 두었다. 1907년 7월 17일 송병준·이완용 등이 헤이그특사 파견을 빌미로 광무황제(고종)의 양위를 주장하였고, 광무황제에게 일본 도쿄(東京)에 가서 일왕(日王)에게 사죄할 것을 강요하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7월 17일 동우회는 긴급하게 특별회의를 열었다. 이때부터 동우회의 활동에 변화가 생겼다. 동우회 특별회의에 참가하여 회원들과 함께 고종의 일본행을 막기로 하고, 송병준·이완용 등을 국적(國賊)이라 규탄하였다. 7월 18일 회원들의 적극적인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회장과 부회장이 사임하자, 회원들은 윤이병과 김재붕(金在鵬)을 회장과 부회장으로 선임하고 조직을 새롭게 재편하였다. 이에 따라 동우회는 이전과 달리 ‘황실 존중’, ‘청년 교육’, ‘동양 평화’ 등을 표방하고 광무황제에게 이완용·송병준 등을 주살(誅殺)할 것을 상소하는가 하면 백성들과 함께 저지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종로 포전도가(布廛都家)에 임시사무소를 마련한 뒤 ‘만민공동회만인소청(萬民共同會萬人疏廳)’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윤이병이 남대문 정거장(현 서울역)에 가서 광무황제의 일본행을 저지하자는 연설을 하자 회원들과 함께 경운궁 대한문과 그 위쪽에 있었던 포덕문(布德門) 앞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저지하는 경관들과 투석전까지 벌이며 저항하였다. 이때 광무황제의 일본행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일단 해산하였다. 7월 19일 광무황제의 양위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동우회는 이를 저지하기로 결의하고, 이튿날 7월 20일 원구단에 있던 석고단(石鼓壇)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이때 석고단 모임에 참석하였다. 단상에 오른 한 회원이 매국 대신들이 입궐하여 직접 처단키 어려우니 서소문 밖에 있던 이완용(李完用) 집을 불태우자고 하였다. 강태현(姜泰鉉)·송영근(宋榮根) 등과 함께 이를 실행하기 위한 결사대에 참가하여 이완용의 집으로 달려가 방화를 결행하였다. 그럼에도 1907년 7월 20일 경운궁에서 광무황제의 양위식이 거행되었다. 다음날 일본군은 동우회에 대중 집회 금지를 명령하였고, 7월 25일에 경시청(警視廳)에서 동우회 사무실을 압수 수색하였다. 그 결과 7월 28일 회원 2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 이어 윤이병 외 19명과 함께 8월경 감옥서로 이송되었다. 1907년 12월 29일 평리원에서 유형 10년을 받았다. 1908년 1월 16일 전라남도 진도(珍島)로 유배되어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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