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용
尹世茸1868. 12. 12 ~ 1940. 2.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동창학교
- · 한교공회
- · 대한독립단
- · 대한통의부
- · 참의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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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1868년 12월 12일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 현 밀양시) 부북면(府北面) 무조리(舞鳶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무송(茂松)이다. 원 이름은 세두(世斗)로 후일 세용(世茸)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상문(庠文), 호는 순가(舜可)·백암(白菴)이다. 이명으로 윤성좌(尹聖佐)·윤용좌(尹溶佐)를 비롯하여 윤세용(尹世鎔·尹世溶·尹世瑢·尹世鏞)·윤성조(尹成祚)·윤세위(尹世韋)·윤세즙·김용대(金瀧大·金用大·金龍大·金溶大)·백두산인(白頭山人) 등을 사용하였다. 가선대부를 지낸 윤희진(尹憘震)의 장남이며, 대종교 제3대 교주인 윤세복(尹世復)의 형이다. 숙부인 청도 김씨와 일찍 사별하였고, 후처인 밀양 박씨와의 사이에 영선·수선·장선·우선·창선·정선의 6남과 3녀를 두었다. 신민부(新民府) 군자금 모집사건으로 1928년 붙잡혀 징역 5년의 옥고를 겪은 윤창선(尹昌善)은 5남이며, 사위인 이병묵(李丙黙)도 의열단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징역 10년을 받고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동생 윤세복이 1911년 (음)2월경에 먼저 만주로 출발하고, 이후 고향의 가산을 정리한 다음, 가족들을 인솔하고 만주 평톈성(奉天省) 환런현(桓仁縣)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직후인 (음)5월경 동생인 윤세복 및 이원식(李元植)과 함께 환런현에 동창학교(東昌學校)를 건립하였다. ‘동창’은 우리나라의 무궁한 발전과 국권 회복을 기약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교명으로, 학교 설립 취지는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인재 양성에 두었으며, 단군신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교장은 이원식이 맡았으며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를 비롯, 이극로(李克魯)·김영숙(金永肅)·김규환(金奎煥)·이시열(李時說)·김진호(金鎭浩)·김석현(金錫鉉) 등이 교사로서 조선의 역사와 국어, 한문, 지리 등을 가르쳤다. 일본영사관의 협박과 감시 끝에 중국 관헌에 의해 폐지령이 내려졌고, 윤세복을 비롯한 학교 교사들과 함께 추방령이 내려져 류허현(柳河縣)으로 이주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한교공회(韓僑公會)를 조직하고 총무를 담당하였다.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했으며, 1920년 6월에는 홍주(洪疇)에게 무기 운반을 주선하였다. 단총 15정과 탄환 1,500발을 구입해 돌아오던 중 펑톈성 대와보(大瓦堡)에서 토군(土軍)에게 무기를 강탈당했으나, 무기를 구입한 목적과 사정을 글로 납득시켜 일체를 반환받았다. 부민단(扶民團)과 한족회(韓族會) 등에서도 교육활동을 계속하였다. 1922년 6월 2일 손서하(孫西夏) 등과 한교민단(韓僑民團)의 대표 자격으로 남만주 8개 단체 71명의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결성한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에 참가하였다. 남만한족통일회는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 통일기구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와 의용군을 결성하였다. 참모로서 참모부장 이천민(李天民)·부감 전덕원(全德元) 등을 보좌하였다. 이후 통의부에서 의군부가 분리해 나가고, 두 단체 간의 갈등과 대립을 거쳐 1924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가 결성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25년 현천묵(玄天默)·조성환(曺成煥) 등과 임시정부의 국무원으로 선임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25년 사망한 최석순의 후임으로 참의장으로 추대되었다. 1926년 봄 참의부의 체제 개편을 이끌어 군사와 민정을 아울러 통괄하는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다. 김승만이 참의장으로 선출되는 1927년 3월까지 참의장직을 맡았고, 이후 대종교 발전에 이바지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40년 2월 2일 둥싱현(東興縣)에서 병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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