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보
尹德甫1881. 1. 1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독립군비단
- · 농민회
- · 신한청년회
- · 광정단
- · 동우회
- · 정의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5) 1881년 1월 1일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경포면(景浦面) 좌상리(左上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윤병용(尹秉用·尹秉庸)·윤죽보(尹竹甫)·박시빈(朴時彬)·박시화(朴時和) 등을 사용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후 일제 경찰이 추적하자 서간도의 창바이현(長白縣)으로 넘어갔다. 이곳에서 함경도 출신 민족운동자들과 힘을 합해 1919년 중반 무렵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을 조직하였다. 성립 초기 재무부장을 맡았다. 대한독립군비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하면서 상호 연락을 갖고 무장활동을 수행한 독립군단이었다. 1919년 10월 발표된 약장(約章) 제1조에 “본단은 아임시정부(我臨時政府) 국무총리총재각하의 명령에 의해 조직된다”고 명시하였다. 약장의 명시와 함께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이한평(李漢平, 일명 이태걸(李泰杰))·김정익(金鼎益) 등을 단장과 경무원 등으로 선임하였다. 본부 조직이 완료되자 군비단은 만주 및 국내, 소련 연해주에 지단(支團)을 조직해 갔다. 본부가 있는 창바이현에는 8도구(道溝) 남강성리(南江城里)에 제1구 지단을 설치한 것을 비롯해 13·15·17·18도구 등에 지단을 설치하고, 16도구 신창동(新昌洞)에 통신사무국을 설치하였다. 1921년 중순 이 통신사무국의 국장대리를 역임하였다. 국내에는 함경도 북청(北靑)·단천(端川) 등에 지단을 설치하였다. 1919년 10월경 함경도에 설치된 이들 군비단 지단조직을 활용해 임시정부 교통국 산하인 임시 함경남도 교통사무국을 설치하고 국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소련에는 흑룡강 방면에서 소왕령(蘇王嶺)에 이르는 지역 곳곳에 지단 성격의 군비단 연락 기관을 마련하였다. 1920년 말부터 군비단 병력 약 5백 명이 소련의 이만으로 이동하였다. 병력이 이동하고 난 뒤 창바이현에 남아 있던 군비단 잔류세력은 1921년 가을경 조직을 재편하였다. 재편된 조직의 총단장을 맡아 총무장 한기호(韓基鎬), 비서부장 한동초(韓東礎), 재무부장 이광춘(李光春), 통신부장 이두인(李頭寅), 향군부장 이재화(李在華), 소집부장 장기선(張基善), 의용부장 임경열(林京烈), 경호부장 임병극(林炳極) 등과 함께 항일활동을 추진해 나갔다. 1921년 10월 창바이현에 근거지를 구축한 광복단(光復團)·흥업단(興業團) 등과 연락을 취해 농민회(農民會)를 조직하였다. 독립군단을 후원하는 이 단체는 창바이현에 거주하는 이주 한인들로 만들어졌다. 이듬해 1월 이들 군단과 협의해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한인 청년들을 독립군으로 양성할 목적에서 만들었다. 창바이현 한인 마을 구장(區長)들이 간부가 되었고, 가입 자격은 14에서 25세까지의 남자 청년이었다. 군비단을 중심으로 주변의 독립군단 및 한인사회를 아우르며 이끌어가다 1921년 말 창바이현과 접해있는 푸쑹현(撫松縣)에 근거지를 둔 흥업단과 통합해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을 성립시켰다. 1922년 4월 대진단(大震團)·태극단(太極團)·광복단(光復團) 등과 통합해 광정단(光正團)을 만들고 본부 단장에 취임하였다. 부단장 강건(姜健), 총무 이태걸, 재무부장 이병율(李秉律), 군사부장 강승경(姜承京), 통신부장 임태선(林泰仙) 등이 간부로 선임되었다. 이 통합군단 또한 군비단 시절과 마찬가지로 본부가 있는 창바이현은 물론이고 주변의 푸쑹·린장현(臨江縣)까지 지단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폭탄까지 제조해 충분한 무장력을 갖추고 활발한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만주지역에서는 일본 군경이나 독립군을 탄압하고자하는 중국 군경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고, 국내에서는 3~4명에서 1개 소대 병력으로 유격대를 편성해 초산·갑산·혜산진·삼수 등으로 진입해 활동을 펼쳤다. 여러 독립군단을 통합해 더욱 강해진 군사력을 가진 광정단이 이같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자 일제 또한 이 군단을 주목해 중국 측을 압박해 공동으로 탄압해 왔다. 특히 단장을 목표로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해 왔는데, 한번은 대원 1명과 취침하다 한밤중에 중국 순경대의 공격을 받고 간신히 탈출한 경우도 있었다. 1923년 1월 임시정부의 향후 역할과 기능을 논의한 국민대표회의에서 현재의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자는 창조파의 입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창조파는 6월 7일 새로운 정부 수립을 위한 전문 18조의 헌법초안을 기초하고, 33명의 국민위원을 선임한 국민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김규식(金奎植)·박용만(朴容萬)·윤해(尹海)·신숙(申肅) 등과 함께 국민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 발표된 국무위원에서 새 정부의 재무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창조파는 이같이 정부를 구성해 소련 정부의 지원을 희망하며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하지만 재정지원을 약속했던 소련 정부는 약속을 파기한 채 새 정부 수립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지 않고 1924년 2월 초 서면으로 사임을 청하였다. 한편, 창조파가 국민위원회를 구성해 새 정부 수립에 노력하고 있을 때인 1923년 8월 15일 남만주 화뎬현(樺甸縣)에서 또 다른 독립운동 단체 통일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58명으로 대부분 만주지역 독립군단의 간부였다. 텐진(天津)에서 의열단(義烈團)대표 1명, 상하이에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대표 1명과 김철(金撤)·장계상(張繼相)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남북만 각 단체의 통일과 군사기관 통일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각 단체의 통일을 위해서 만몽신당(滿蒙新黨)을 조직하자는 결론을 냈고, 그 간부와 조직원까지 선임하였다. 총리 이범구(李範久), 부총리 김성극(金星極), 서무부장 김동삼(金東三) 등이 그들이다. 이때 서무부 부원으로 임명되었다. 1924년 2월 양기탁(梁起鐸)·손정도(孫貞道)·오동진(吳東振) 등과 지린성내(吉林城內)에 재만 한인의 산업 부흥과 교육 촉진을 목표로 한 동우회(同友會)를 설립하였다. 화뎬현 회의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만주독립운동계의 지도자인 까닭에 역원(役員)으로 선임한 것이고, 이 단체는 민족운동계의 지도자들과 힘을 합해 설립한 것이었다. 동우회는 지린성내에 중앙부를 설치하고 이주 한인사회 각 촌락에 지방부를 설치해 설립목표인 한인사회의 산업과 교육활성화를 위한 활동을 수행하였다. 1924년 7월 10일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를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한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 발기회가 개최되었다. 이 발기회에 김호(金虎)와 함께 광정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참석한 단체는 광정단을 비롯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대한독립군·대한독립군단·통의부(統義府)·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의성단(義成團) 등이었다. 이들 단체 대표들과 대동단결하여 만주의 독립운동계를 통일하자는 전만통일발기문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10월 18일 잡륜자치회(卡倫自治會)·고본계(固本稧)·학우회(學友會) 등 3개 단체를 추가해 본회의를 개최하고 통일단체 결성 작업을 위한 분과위원을 선임하였다. 이때 김호·승진(承震, 의성단 단장)과 함께 재정분과를 맡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24년 11월 24일 남만주의 통합 독립군단인 정의부(正義府)가 탄생하였다. 통합에 가담한 단체는 광정단·통의부·서로군정서·의성단·노동친목회·고본계·잡륜자치회·길림주민회 등 8개였고, 학우회나 기타 단체는 임시정부와의 관계 설정, 향후 추진해 갈 노선 등 합의점을 찾지 못한 여러 가지 사유로 중도 포기하고 말았다. 성립 당시 류허현(柳河縣)에 본부를 둔 정의부 중앙조직의 중앙행정위원 겸 교통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중앙조직의 행정부서는 민사·군사·법무·학무·재무·교통·생계·외무 등 8개였고, 이들 위원회의 위원장은 중앙행정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중앙행정위원장은 이탁(李沰), 민사위원장은 현정경(玄正卿), 군사위원장은 지청천(池靑天), 법무위원장은 이진산(李震山), 학무위원장은 김용대(金容大), 재무위원장은 김이대(金履大), 생계위원장은 오동진(吳東振), 외무위원장은 김동삼(金東三) 등이었다. 교통위원회는 체신과·운수과 등을 하부 조직으로 갖고 정보·통신 등을 관장하였다. 체신과는 서신 등 우편물, 전보 등의 수발과 교통기관의 배치와 연락에 관한 사항을 취급했고, 운수과는 물품 운반을 주관하였다. 이주 한인사회와의 연락, 항일활동 수행을 위한 정보 입수 및 전달 등을 주관하는 부서였다. 1925년 10월 10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었으나 취임을 거부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성과 없이 끝나고 난 뒤 임시정부의 인사들은 효율적인 독립운동 수행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 결과 제2대 박은식 대통령 이후부터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초대 국무령에 취임한 이상룡(李相龍)은 초대 국무위원 9명을 임명하였다. 그런데 그 중 이유필(李裕弼)을 뺀 8명이 김좌진(金佐鎭)·오동진(吳東振) 등 만주 독립운동계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만주독립운동계 인사 모두 취임을 거부하고 가지 않았다. 정의부에서의 활동을 끝으로 만주를 떠나 소련 연해주로 넘어갔다. 1930년대 초반 콜호즈 참모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에는 연해주 민족운동계 지도자들과 항일무장활동에 투입할 비행기 건조 비용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행적은 확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