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규
吳東奎1880. 7. 27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광복군총영
- · 대한통의부
- · 정의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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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5) 1880년 7월 27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광평면(廣坪面) 청수동(靑水洞)에서 태어났다.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지역 항일무장활동의 주역인 오동진(吳東振)의 사촌형이다. 오동진은 생후 8개월 만에 생모를 잃어 이후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그러나 할머니마저 그의 나이 3살 때 돌아가시자 이후부터는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다. 오동진의 부친은 아내가 죽자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다 아들이 12살이 되던 해에 계모를 데리고 돌아왔다. 이후부터 오동진은 아버지와 계모와 함께 살았다. 이런 성장과정에서 오동진은 12살이 될 때까지 유아·소년기는 큰집에서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부모로 알고, 사촌들을 친형제로 여기며 성장한 것이다. 따라서 오동진과는 사촌간이라고는 하나 친형제나 다를 바 없다. 1921년 12월경 일제 경찰이 찾아와 오동진의 만주 거처를 말하라고 윽박지르며 길안내를 강요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의주군 만세운동을 주도한 오동진은 일제의 검거망이 좁혀 오자 압록강을 넘어 서간도(西間島)로 망명하였다. 오동진은 서간도 콴뎬현(寬甸縣)에서 청년들을 모아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을 조직해 항일무장활동을 펼쳤다. 1920년 초에는 이 청년단을 통합독립군단(獨立軍團)인 광복군(光復軍) 산하의 특수부대인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으로 확대, 발전시켰다. 오동진은 이 총영의 총영장이 되어 활발한 항일무장활동을 펼쳐 일제에게 만세운동 때보다 더 중점 검거 대상이 되었다. 만주로 망명하지 않고 고향을 지키고 있었던 것인데, 오동진의 거처를 대라는 일제 경찰들의 압박을 받으며 압록강을 넘었다. 안둥(安東, 현 단둥(丹東))에 도착해 다시 강변을 따라 동쪽으로 한참을 올라가 광복군총영이 있는 콴뎬현에 도착하였다. 콴뎬현은 자주 왕래한 지역이었기에 지리에 밝았다. 이곳에서 마침내 일제 경찰들을 따돌리고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김병순(金秉順)의 집으로 가 은신하였다. 얼마동안 그 곳에 머무르다 고향에 돌아가기가 어려워졌음을 깨닫고 1922년 초 광복군총영의 대원이 되었다. 광복군총영의 근거지인 콴뎬현을 포함해 남만주에 근거지를 둔 한국 독립운동단체들은 1921년 후반부터 통합운동을 전개하였다.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참변(間島慘變))’에 의해 파괴된 독립군 기지와 이주 한인 사회를 힘을 합해 재건하고 효율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1920년 10월 서·북간도를 침입한 약 2만 명의 일본군은 불과 10월과 11월 두 달 만에 3천 6백 명이 넘는 한인을 살해하고, 3천 6백 채의 민가와 교회·학교 등을 파괴해 소실시켰다. 남만 지역의 독립운동자들은 이 같은 현실을 극복하고 더욱 힘을 내 광복 달성에 매진하기 위해 통합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 결과 1922년 8월 남만의 통합독립운동 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통의부가 성립되자 관서총관소(寬西總管所)의 검무원(檢務員)이 되었다. 통의부는 한인 사회를 재건하고 한인들의 생계를 도모하기 위한 공동 자금을 마련코자 관할지역내에서 의무금을 징수하였다. 검무원은 이 의무금을 징수해 중앙본부에 보내는 것이 주임무였다. 하지만 파괴된 사회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의무금을 마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검무원은 의무금을 징수하는 대신 통의부의용군 소속의 독립군들과 함께 군자금 모집에 나서기도 하였다. 1923년 (음)정월 관서총관소의 총관 이용규(李龍奎)의 지휘를 받으며 의용군 소속 독립군 1명과 함께 압록강을 넘었다. 관서총관은 콴뎬현의 서쪽에 위치해 안동현과 접한 지역으로 압록강만 넘으면 의주군이었다. 의주군 가산면(加山面) 방산동(方山洞)으로 진입한 군자금 모집 유격대는 그곳의 친일 또는 일반 부호의 집 수 곳을 기습적으로 들어 가 상당한 금액의 군자금을 모집해 총관소로 돌아 왔다. 돌아온 뒤 얼마 되지 않은 같은 달, 의용군 대원 4명과 함께 또 다시 군자금 모집 유격대에 참여하였다. 야밤을 이용해 출격한 이번 유격대의 대장은 의용군 참사 김용봉(金龍鳳)이었다. 대장 김용봉은 국내로 진입하는 길에서 이번에는 군자금 모집보다는 일제의 주재소를 습격해 무기를 확보하자는 안을 일행들에게 말하였다. 이 의견에 모두 찬동해 유격대는 의주군에 있는 조제암주재소(鳥啼岩駐在所)를 기습 공격하였다. 이 작전에서 일제 경찰 1명을 사살하고, 주재소내의 무기를 모두 탈취해 콴뎬현으로 돌아왔다. 이어 같은 해 8월경에는 의무금이 거의 징수되지 않자 총관의 인솔하에 의용군 대원 1명과 같이 국내로 진입하였다. 이번에는 의주군 가산면 도령동(都嶺洞)으로 가 부호들의 집을 습격해 15원의 군자금을 모집해 돌아왔다. 해를 넘긴 1924년 (음)정월에는 총관 이용규와 의용군 대원 1명과 함께 가산면 방산동으로 진입해 부호 김진기(金珍基)의 집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 같은 활동을 하고 있을 때, 통합 독립운동단체인 통의부는 구성원 중 복벽주의계 인사들이 1923년 초 의군부(義軍府)를 만들어 이탈하였다. 또 1924년 초에는 적극적인 항일무장활동을 제1노선으로 한 인사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군사기관임을 자임하며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해 나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잔류 통의부 지휘부는 다시 통합운동을 전개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광정단(光正團)·의성단(義成團) 등 7개 단체와 통합해 1924년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켰다. 정의부도 이주 한인의 생계를 도모할 자치기구와 의용군을 편성하였다. 해가 바뀌고 소속 단체가 변경되었지만 여전히 관서총관소의 검무원으로 활동하였다. 즉 총관 이용규와 함께 정의부의 관서총관소 소속원이 된 것이다. 1925년 (음)정월 의용군 대원 2명과 함께 의주군 방산동으로 진입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돌아왔다. 이어 같은 달 여러 명의 의용군 대원이 총관에 도착하였다. 이들과 함께 관서총관 사무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콴뎬현에 사는 친일 밀정 홍순범(洪順範)의 집을 기습해 들어갔다. 일행은 홍순범을 체포해 압록강변으로 데려가 총살해 처단하였다. 그리고 시신을 압록강에 던져버렸다. 1926년 (음)정월에는 의용군 대원 2명과 함께 광평면 부평동(富坪洞)에 들어 가 여러 집에서 군자금을 모집해 돌아왔다. 그리고 해가 바뀐 1927년 (음)정월에는 의용군 대원 4명과 함께 고향인 광평면 청수동으로 갔다. 청수동은 오동진의 영향으로 마을 사람 모두가 강한 반일 의식을 가진 곳이었다. 일제는 오동진이 언젠가 고향에 돌아 올 것을 예상하고 청수동에 경찰파출소를 신설하기까지 하였다. 이 파출소를 경계하며 감시망을 뚫고 마을로 들어 가야했기에 다른 때와는 다르게 대원을 4명이나 대동했던 것이다. 윽박지를 필요도 없이 청수동 사람들의 자진 납부에 의해 90원이나 되는 거금을 마련해 돌아왔다. 40세가 넘은 비교적 많은 나이에 만주지역 독립운동에 참여했기에, 독립군단 조직 깊숙이 관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 수행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군자금 모집, 친일 밀정 처단 활동 등을 벌이며 온 힘을 쏟았다. 때문에 일제는 사촌동생 오동진을 체포하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검거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8년 5월경 일제의 창성경찰대에 붙잡혔다. 1927년 12월 16일 창춘(長春)에서 체포된 오동진보다 약 5개월 뒤에 붙잡힌 것이었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강도, 살인 등으로 무기징역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1929년 7월 1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재차 상고하였다. 1929년 9월 30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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