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선
吳光鮮1896. 5. 13 ~ 1967. 5. 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서로군정서
- · 한국독립군
- · 낙양군관학교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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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1896년 5월 13일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원삼면(遠三面) 죽릉리(竹陵里) 어현(於峴)에서 부친 오인수(吳寅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海州), 초명은 오성묵(吳性默)이고, 호는 취송(聚松)이다. 부친은 1907년 용인지역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서대문감옥에서 6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3년 부인 정현숙(이명 정정산)과 결혼하여 슬하에 오희영(吳姬英)과 오희옥(吳姬玉), 오영걸(吳永傑) 등을 두었다. 광복군 출신 신송식(申松植)이 큰 사위이다. 1908년 여준(呂準)이 죽릉리에 세운 삼악학교(三岳學校) 고등과에서 수학하고 1913년 졸업하였다. 이 무렵 용인 이동면 화산리 태생의 정정산과 혼인하였다. 1914년 서울로 올라와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문을 닫게 됨에 따라 낙향하였다. 1915년 가을 조카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베이징(北京)에 도착하여 “조선의 광복을 되찾겠다”는 결의의 표시로 이름을 ‘광선(光鮮)’으로 바꾸고, 베이징 북부에 소재한 보정강무학교(保定講武學校)에 입학하여 6개월 동안 폭탄 제조법 등을 배웠다. 다시 서간도 퉁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있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초등군사반에 입학하여 1918년 12월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 무렵 국내에서 부친과 부인이 이주해 와서 가정을 이루었다. 이후 합니하에서 200여 리 떨어진 해룡현(海龍縣) 성수하자(聖水河子)에 있는 동흥학교에서 군사교육과 체육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며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대대 1중대장·3중대장·1대대장을 역임하며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였다. 청산리전투 후 독립군들은 새로운 항일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방향을 바꾸어 북만주 중·러 국경 부근 미산(密山)으로 향하였다. 서로군정서군도 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의 인솔 하에 본대는 북만주로 향하였다. 미산에서 합류한 독립군부대는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한 뒤 조직의 명칭을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으로 바꾸고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지휘부는 총재 서일(徐一), 부총재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 총사령 김규식(金奎植), 참모총장 이장녕(李章寧), 여단장 지청천 등이었으며, 이때 중대장에 선임되었다. 1921년 1월 러시아 경내인 이만(Иман)을 거쳐 5월 중순경 자유시(自由市, 현 스보보드니(Свободный))로 이동하였으나, 이른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소련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6개월 만에 탈출에 성공하여 얼음에 뒤덮힌 바이칼호를 맨발로 걸어 미산을 거쳐 다시 만주 지역으로 돌아왔다. 1922년 초 지린시 어무현(額穆縣)에 여준이 세운 검성학장(儉成學莊, 후에 儉成中學校로 개칭)에 체육교사로 참여하여, 서로군정서의 새로운 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며 장기 전략을 세웠다. 1924년 가을 무렵 검성중학교는 제1회 졸업생 30여 명을 배출하였다. 이어서 같은 용인 출신인 김혁(金爀)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이 조직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여단부관(旅團副官)을 맡았다. 1930년 7월 26일 지린성(吉林省) 웨이허현(葦河縣)에서 지청천·홍진(洪震) 등의 주도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결성되자 군사부위원 및 한인사회를 대상으로 독립군병사 징집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위원회 징집책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 1931년 11월 아청현(阿城縣) 대길하(大吉河)에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이 결성되자 의용군중대장에 임명되었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같은 해 12월 지청천 등 한국독립당 간부들과 함께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사령 딩차오(丁超) 및 호로군연합군(護路軍聯合軍) 양원훼이(楊文揮) 2군장과 카오펑린(考鳳林) 3군장 등을 만나 한·중 연합을 통한 반만항일(反滿抗日) 작전에 관해 협의하였다. 이후 한국독립군을 지휘하여 일면파전투(一面坡戰鬪)·연수현전투(漣水縣戰鬪)·아성전투(阿城戰鬪)·쌍성전투(雙城戰鬪)·경박호전투(鏡泊湖戰鬪)·동경성전투(東京城戰鬪)·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동녕현전투(東寧縣戰鬪)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만주국 수립과 관동군의 증강 배치 등으로 만주 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 여건이 악화됨에 따라,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은 중국 관내 지역으로의 이동을 결정하였다. 1933년 전반 한국독립당에서 이규채(李圭彩)·김상덕(金尙德) 등과 함께 난징(南京)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난징은 중국 관내 지역 독립운동의 주무대였다. 부인 정정산의 회고에 의하면, 이 무렵 가족은 베이징에서 1년 여, 톈진(天津)에서 2년 여 거주하였는데, 이때 중국 철도에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생계를 해결하였다고 한다. 지청천의 밀사(密使) 자격으로 난징에 와서 김구(金九)와 면담하여, 재만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난징 이동, 한인특별반 운영 참여, 한국독립군의 입교 문제 등에 관해 협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한국독립군의 이동경비를 지급하였다. 1933년 11월 한국독립당원과 한국독립군 대원들은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어 베이징을 경유하여 난징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한국독립군 간부들과 함께 중국군관학교 뤼양분교(洛陽分校) 내에 설립한 한인특별반(韓人特別班)의 교관으로 부임하였고, 한국독립군 대원들은 한인 특별반 입교생으로 1년 여 동안 군사교육을 받았다. 1936년 김구의 지시로 만주에서의 독립군기지 재건을 목적으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규합 조직화하는 임무를 띠고 베이징에 파견되어, 금은방을 차리고 이를 거점으로 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관동군 참모장이며 일제특무기관의 책임자인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중장 암살을 준비하던 중, 1937년 1월 2일 일제에 붙잡혔다. 11개월에 걸쳐 고문과 조사를 받으면서도, 가명을 쓰고 중국인 행세를 하여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3년간 옥고를 겪고 1940년 11월 풀려났다. 이후에는 하얼빈(哈爾濱) 인근 지역에서 항일 지하활동에 참여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0월 만주와 북한 지역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시 10월 29일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김구를 만나 광복군 국내 지대의 조직에 합의하고, 소장 계급장과 함께 광복군 국내지대장에 임명되었다. 11월 5일 귀국하여 동대문 밖 숭인동(崇仁洞)에 ‘광복군 국내지구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취임한 다음 이승만(李承晩)과 김승학(金承學)을 고문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모집된 광복군 국내지대 병력은 740여 명에 달했다. 11월 26일 광복군사령부 사열 행사를 치렀다. 이후 임시정부요인들에 대한 경호 임무를 맡았으며, 새로운 국가 건설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사관생도 양성을 목적으로 ‘대한무관학교(大韓武官學校)’ 설립에 힘을 기울였다. 1946년 2월 개교를 목표로 334명의 생도를 선발하였으나, 미군정의 ‘사설군사단체 해산령’에 따라,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후 모집한 대원들을 기반으로 광복청년회(光復靑年會)를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과 훈련원장을 맡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계기로 국군 창설에 투신키로 결심하고, 같은 해 12월 육군사관학교 8기 고등장교특별훈련반에 입대 수료 후 육군대령으로 임관하였다. 이후 호국군 100여단장·서울지구병사구 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6·25전쟁 시에는 강원도·충남지구·제주도지구 병사구 사령관, 휴전 후에는 대전지구 위수사령관과 전북지구병사구 사령관 등을 지낸 다음, 1956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963년부터는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한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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