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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석

吳元錫

1899. 1. 25 ~ 1972.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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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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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康津)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강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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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강진청년동맹
  • · 신간회
  • · 전남운동협의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9년 1월 25일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 군동면(郡東面) 덕천리(德川里)에서 태어났다. 신간회(新幹會)와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 등에서 활동하며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경성사립국성중학교(京城私立國星中學校)를 졸업하고 1926년 5월부터 그 해 9월까지, 강진군 사립학술강습소 강사로 근무하였다. 이어 약 2년간 금일면(金日面) 금당동(金塘洞) 사립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이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소작문제에 자극받아 사회과학 서적을 열독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농촌운동, 신간회 운동 등에 적극 참가하였다. 군동면을 중심으로 농촌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는데, 1923년 음력 1월, 군동면의 진명청년회(進明靑年會)에서 부인과 노동자의 각성을 독려하고자 순회강연회를 조직하였을 때 ‘부인의 각오’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이후 1926년 2월 27일 열린 군동면 소작인공제회 정기총회에서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날 총회에서 소작인공제회는 군동농민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8년 4월 20일에는 군동면에 덕천야학도 설립하였다. 설립 당시 학생 수는 60명이었다. 민족통일전선운동인 신간회 강진지회 설립과 조직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1928년 1월 31일 천도교 종리원에서 열린 신간회 강진지회 정기대회를 의장으로서 주재하였으며, 간사로 선출되었다. 또 본부 대회에 출석할 대의원으로 선임되었다. 당일 오후 열린 간사회에서는 정치문화조사연구부 총무간사에 선임되었다. 1929년 신간회 강진지회 임시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8월 10일 열린 제3회 임시대회에서는 조직선전부장에 선출되었다. 이어 1930년 4월 6일, 강진청년동맹(康津靑年同盟) 제1회 정기총회에서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전라남도 연맹대회에 동 동맹을 대표하여 참석하기도 하였다. 강진청년동맹은 사회주의 성향의 조선청년총동맹의 산하 조직으로 1927년 12월 23일 창립된 조직이었다. 한편 1930년 5월 25일 강진지회 집행위원회에서 전체대회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회비 징수를 독려하는 역할을 맡기로 하였다. 1931년 11월에는 군동면의 소작쟁의를 주도하였다. 군동소작회(郡東小作會) 회원들은 지주들에게 소작료 감하를 요구하고 일제의 지방통치기관에도 이를 진정하였으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같은 해 11월 28일 회원 200여 명은 가네다산업주식회사(鎌田產業株式會社) 목포지점 강진출장소(康津出張所)에 찾아가 교섭을 시도하였고 일제 경찰들이 회원들을 강제 진압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같은 날 오후, 회원 500여 명이 강진군 경찰서에 집결하여 회원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때 일제 검찰에 의해 검거 대상이 되었다. 이후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은신하고 있었으나, 1932년 7월 7일, 오전 3시 덕천리 자택에서 붙잡혔다. 같은 해 9월 7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이른바 폭력행위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으며, “우리와 같은 기근에 처한 자로서는 소작료 감하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진술하였다. 같은 해 9월 15일, 징역 1년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932년 9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1933년 비밀결사 전남운동협의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전남운동협의회는 1933년 5월 14일, 김홍배(金洪培) 등 완도(莞島)와 해남(海南) 지역의 사회운동가들이 노농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조직한 사회주의 비밀결사단체였다. 전남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단체로 기관지 『농민투쟁』을 발간하고 농민반, 야학을 설치하는 등 사회주의 사상 보급과 조직 확대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1934년 2월 일제의 대검거에 의해 활동이 위축되었다. 1933년 11월 29일 동지 조정구(趙政九)·김호기(金浩基) 등과 함께 무산아동에게 사회주의를 교육하여 장래의 무산투사를 양성하고자 군동면 쌍덕리(雙德里)에 개량서당을 설치할 것을 협의하였다. 또 다음 날, 1934년에 시행될 군동면 호안공사에 참가할 노동자와 농민의 임금 인상을 위한 노동쟁의를 준비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로 인해 1934년 2월 일제 경찰이 전남운동협의회 가담자들을 색출하자 붙잡혔으며, 같은 해 9월 9일 전남운동협의회 활동으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 송치되었다.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일수 중 545일 본형 삽입)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936년 12월 28일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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