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東暢
東暢1898. 9. 22 ~ 1988. 8. 3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동군 임동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8년 9월 22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동면(臨東面) 수곡동(水谷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21일 안동군 임동면 중평동(中坪洞) 편항시장(鞭巷市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안동군 편향시장 만세운동은 월곡면(月谷面) 계곡동(桂谷洞)에 사는 유연성(柳淵成)이 주도가 되어 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유곡란(柳谷蘭) 등과 함께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3월 21일 편항시장에서 시위를 펼치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각자 분담 지역을 정한 후 주민들을 만세운동에 동원하기로 하였다. 수곡동은 유교희(柳敎熙)가 맡아서 사람들에게 편항시장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날 예정임을 알리고 동참을 독려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참여하게 되었다. 1919년 3월 21일, 거사 당일 편항시장으로 향하였다. 오후 2시경 장꾼과 주민들로 붐비던 장터 중앙에 유연성이 군중들 앞에 섰다. 유연성은 만세운동을 왜 해야 하는지 연설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유연성의 만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제히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장터 중앙에서 울려 펴진 만세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면서 열기를 더해갔다. 유연성의 연설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점점 대규모 시위로 변해갔고, 이 소식을 접한 일제 경찰은 현장으로 출동하여 시위대 해산을 꾀하였다. 급파된 일제 경찰 한 명이 체포에 저항하는 배태근(裵太根)의 뺨을 때리자 분노한 군중들이 일어났다. 군중들과 함께 “저놈 죽여라”고 외치며 일제 경찰에게 달려갔고, 이를 본 일제 경찰은 주재소로 달아났다. 이어서 시위대도 주재소로 향하여 나아갔다. 5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게 유동수 등의 지휘에 따라 주재소로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주재소 앞에 다다른 시위대는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일제 경찰이 권총을 쏘며 제지하였다. 이를 본 유연성·조학이(趙學伊)·유곡란은 가슴을 열어 제치고 일경에게 다가가 “죽이려거든 여기를 쏘아라”고 하였다. 사태를 파악한 일제 경찰은 달아났고 일부 시위대는 쫓아가 응징하였다. 시위대는 돌과 몽둥이로 출입문을 부수고 들어가 주재소 벽과 창문을 완전히 부수고 사무실 안의 기물과 문서 등도 모두 파괴하였다. 또한 일제 경찰에게서 빼앗은 대검과 권총, 주재소 안에 있던 탄환과 칼 등도 모두 모아 주재소 뜰에 있는 우물 안에 모두 버렸다. 시위대의 격렬한 저항에 주재소는 겨우 기둥과 지붕만을 남겨 놓은 채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주재소 시위를 마치고 일부 군중들과 함께 자진 해산하였다. 남은 시위대는 기세를 몰아 면사무소로 달려갔다. 오후 5시경 1,0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면사무소의 벽과 창문, 가스등을 파괴하고, 사무실 안 유리창과 천장은 물론 책상과 의자 등의 비품과 장부도 모두 파괴하였다. 면사무소도 주재소와 같이 폐허가 되었으며, 시위는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이어진 후 마무리 되었다. 다음날부터 일제 경찰의 강도 높은 검거 작전이 펼쳐졌고, 이 과정에서 붙잡혔다. 1919년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건조물손괴죄, 가택침입죄, 상해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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