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景發
景發1896 ~ 1922. 4.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동군 임동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강원도 삼척군(三陟郡) 상장면(上長面) 황지리(黃池里, 현 태백시 황지동) 출신이다. 1919년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23세로 1896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북면(臨北面) 사월동(沙月洞)으로 이주하였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21일 안동군 임동면(臨東面) 중평동(中坪洞) 편항시장(鞭巷市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안동군 편향시장 만세운동은 월곡면(月谷面) 계곡동(桂谷洞)에 사는 유연성(柳淵成)이 주도하여 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 등과 뜻을 모아 편항시장에서 만세시위를 펼쳤다. 유연성을 비롯한 주도자들은 임동면 지역을 나누어 각자 해당 지역을 맡아서 주민들을 동원하기로 약속하였다. 임북면 사월동은 주도 인물들이 담당한 구역에 속하지 않았지만 만세운동 소식이 인근 마을에 암암리에 퍼지면서 만세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3월 21일 거사 당일 아침, 편항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꾼들로 북적이는 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길 기다리다가 오후 2시경 유연성이 군중들 앞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유연성은 군중들을 향하여 왜 만세시위를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였다. 유연성이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다른 장꾼, 주민들과 함께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장터에 있던 군중들이 서로 만세운동을 독려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며 시위 열기가 점점 더해 갔다. 그러나 이때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일제 경찰이 급파되면서 무력으로 군중들을 해산시키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 한 명이 저항하는 배태근(裵太根)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본 군중들이 분노하여 일제 경찰에게 달려가자 놀란 일제 경찰은 주재소로 달아났다. 이어서 유동수·이강욱 등이 선두에서 이끄는 시위대에 속하여 장터를 넘어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행진하는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주재소 앞에 이르렀을 때는 시위 군중이 500명을 헤아렸다. 시위대는 일제 경찰의 총기 위협에도 주재소 출입문을 돌과 몽둥이로 부수고 들어가 주재소 벽과 창문을 파괴하였고, 사무소 안의 비품과 기물을 완전히 부수고 장부와 서류 등도 모두 찢어 파기한 뒤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 또한 일제 경찰에게 빼앗은 총검과 주재소 안에 있던 탄환과 대검, 권총 등 무기를 모두 모아서 주재소 우물 안에 버렸다. 이러한 활동에 앞장서다가 주재소 만세시위를 끝낸 일부 군중과 함께 자진 해산하였다. 하지만 다른 군중은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한 반발심을 드러내며 면사무소로 몰려가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는 면사무소 창문과 벽, 가스등을 남김없이 부수고 사무소 안의 집기와 문서도 모두 파기해 버렸다. 12시 무렵 면사무소까지 초토화 시킨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계속하였고, 다음날 새벽 3시경에 자진하여 모두 해산하였다. 일제 경찰이 다음날부터 만세운동 주도 인물들과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펼치면서 붙잡혔다. 1919년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건조물손괴죄, 가택침입죄, 상해죄,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지만, 그 해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되면서 오랜 옥고를 겪었다. 모진 고문과 옥고를 견디며 1921년 출옥하였지만 고문과 수감 생활의 후유증으로 이듬해인 1922년 4월 5일 2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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