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의모
吳義模1879. 1. 6 ~ 1946. 12. 2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성주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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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9년 1월 6일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초전면(草田面) 동호동(東湖洞)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북장로파 소속 성주군 초전면 동포동(東浦洞) 소재 교회의 영수(領袖)를 지냈다. 1919년 성주군 성주면 장날에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번지면서, 성주군에서도 선남면(船南面) 소학동(巢鶴洞)에서 이현기(李玄琪)가 동민 2~30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이상해(李相海)도 가천면(伽泉面) 동원동(東元洞)에서 마을 청년들과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성주군 여러 마을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면서 이곳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도 영향을 받아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대가면 옥화동(玉花洞)에 있는 교회 조사(助事) 유진성(兪鎭成)이 뜻을 같이할 교회 간부와 신자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거사 날짜를 4월 2일로 정하고, 성주면 장날을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이기정(李基定) 등 성주군의 유림들도 같은 날에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게 된 유진성은 비밀리에 송회근(宋晦根)을 찾아가 힘을 합칠 것을 제안하였고, 송회근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기독교와 유림 세력이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거사 당일인 4월 2일 오후 1시에 기독교인인 유진성·홍진수(洪鎭洙)·김석규(金錫圭) 등과 함께 경산동(京山洞)의 관제묘(關帝廟) 뒷산에 올라가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의 선창에 성주면 시장에 모여 있던 이기정·송회근 등 유림 60여 명도 호응하면서 성주면의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만세운동 소식을 들은 일제 경찰은 시위를 주도한 인물을 체포, 연행하였다. 이를 지켜 본 군중은 더욱 분노하며 저항하였고 점점 더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관제묘 뒷산에는 3,000~4,000명이, 경찰서 앞부터 군청 앞과 양쪽 길에도 7~800명이, 동방 우편국 앞 시장거리에는 1,500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들은 경찰의 발포에 일시 물러났지만 다시 산 위에 모여 10시가 넘는 시간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경산동 도로에서는 선남면(船南面) 문방동(文方洞)에 사는 석연극(石鍊極) 등이 만세운동을 벌이는 등 마을 곳곳에서 밤늦도록 ‘독립만세’의 외침이 들렸다. 이러는 동안 군중이 밤에 일본인 가옥과 경찰서를 습격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일제 경찰은 소방대를 모집하여 경찰과 경찰보 3~4명으로 순찰대를 편성하였다. 또한 대구로부터 일본군 수비병이 급파되었다. 밤 11시경 1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다시 시장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였지만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시위대를 향한 경찰들의 횡포가 극심해지자 분노한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저항하였다. 결국 경찰은 시위대를 향하여 무자비하게 총탄을 퍼부었고, 총탄을 맞은 이태희(李兌熙)·홍기섭(洪基燮)을 비롯하여 성명 미상의 남성 한 명이 그 자리에서 쓰려져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봉희(李鳳熙) 등 7명이 부상을 입는 등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시위대는 부득이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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