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이
吳萬伊1899. 5. 5 ~ 1954. 9. 2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창수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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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9년 5월 5월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신리동(新里洞)에서 태어났다. 다른 사람 집에 고용되어 일을 봐주는 고용인으로 종사하던 중 1919년 3월 일어난 영덕군 창수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제로부터 고초를 겪었다. 창수면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8일 영해면 성내시장에서 일어난 시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발생하였다. 당시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로 유학을 가기 위해 고향을 떠났던 김세영(金世榮)은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목격하였다. 이 소식을 고향 영덕으로 돌아와서 전하고, 영덕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고자 평소 친분이 있던 권태원(權泰源)·정규하(丁奎河) 등과 함께 시위를 계획하였다. 권태원과 정규하는 영덕군의 기독교인, 지방 유지, 각 양반 가문 등 영덕 각지의 세력을 규합하였고, 3월 18일 영해면 성내시장 장날을 맞이하여 약 2,000명이 집결한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였다. 창수면에서 일어난 시위는 영해면의 시위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에 참여하기 위해 3월 19일 이종구(李鐘龜)를 비롯한 창수면 오촌동(梧村洞)과 삼계동(三溪洞) 주민들이 영해면으로 길을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영해면으로 향하던 도중에 신기동(新基洞)에서 다수의 주민을 만나 협의를 하였는데, 영해면까지 가서 시위에 합류하기는 이미 늦었으니 영해면으로 가는 것을 중지하고, 대신 창수면에서 주민들을 모아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신기동 마을 구장인 이현설(李鉉卨)과도 협의하였고, 창수동 마을 구장인 이수각(李壽珏) 등 여러 인물들과 의논하여 각 동네에서 집집마다 사람들을 시위에 참여토록 독려하였다. 이때 밭에서 농사일을 하던 와중에 시위대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아 이에 찬성하여 약 150명의 시위 행렬에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창수면에서 일어난 시위도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시위대는 각자 손에 태극기를 들거나, 도끼나 곤봉 등 무기를 들고 속속 시위 행렬에 합류하여 창수주재소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이수각·이현설 등의 지휘에 따라 창수주재소를 공격하였다. 무기를 지닌 이들은 무기를 사용하여 공격하였고, 이때 무기가 없이 맨손으로 시위 행렬에 있었기에 돌을 구해 던지며 주재소 건물과 물품을 파손하는데 힘을 보태었다. 시위대는 그 날 저녁 무렵 주재소 공격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자 자진하여 해산하였다. 시위가 마무리되자 집으로 돌아갔다가 시위대와 함께 경찰에 붙잡혀 1919년 4월 5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이후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건조물손괴죄, 공무집행방해죄, 기물손괴죄, 공문서훼기죄, 상해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고, 1919년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었으나 1심과 같은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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