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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균

吳東均

1896. 9. 13 ~ 1950.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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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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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高敞)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북도 고창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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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고창군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6년 9월 13일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고창면(高敞面) 읍내리(邑內里)에서 태어났다. 고창 읍내에 있는 사립 양명학교(楊明學校)를 졸업하였고, 1919년 당시에는 고향 마을에서 농업(農業)에 종사하다가 그 해 3월 고창읍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4일 당시 고창면에서 면서기(面書記)를 지내던 김승옥(金升玉)은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창가(朝鮮獨立唱歌), 국민휘보(國民彙報) 등의 인쇄물을 전달받았다. 이어 3월 17일 밤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해 수십 장에 걸쳐 이를 등사하였다. 이렇게 만든 독립선언서 7~8장과 독립창가 50여 장을 다음 날인 3월 18일 김창규(金昌奎)와 함께 받았다. 그날 밤 동지들과 함께 김동옥(金東玉)의 집에 모였고, 마을 주민들 10여 명과 더불어 이튿날인 3월 19일 읍내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전에 일제 경찰에 누설되면서 예정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3월 21일 오전 11시 무렵, 학생들과 군민 100여 명으로 이루어진 시위 군중을 이끌고 만세시위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역설한 후, 이들의 선두에 서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시위대를 이끌고 군청으로 행진했고, 시위대는 그 곳에 나와 있던 군수(郡守)와 군청 직원들에게도 독립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시위대를 해산하고자 출동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1919년 5월 3일 광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에도 계속 민족주의 운동에 관여하여 1920년부터는 『동아일보』 고창지국장(高敞支局長)과 고창노동회(高敞勞働會) 의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1928년 4월 임실군(任實郡) 청년회관에서 열린 제4차 전라북도 기자단 정기총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언론을 통해 호남 지방의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석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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