廉成五
成五1877. 2. 4 ~ 1947. 7.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강화군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7년 2월 4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선두리(船頭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06년 자신의 집 뒤에 선두(船頭, 일명 다로지 혹은 달오지)교회의 예배당을 세울 정도로 강화 기독교 북감리교계의 지도급 인사로 선두교회 권사(勸師)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강화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당시 유봉진(劉鳳鎭)과 함께 시위 계획을 수립하였고, 항일 문서 배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9년 3월 5일 감리교계 지도자 유봉진은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현 연세대학교) 학생이자 선두교회 교인으로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황도문(黃道文)으로부터 만세시위 소식을 전달 받았다. 이어 유봉진이 3월 8일에 찾아와 강화에서도 만세시위를 준비하자는 제안을 하자 이에 찬동하였고, 만세시위 계획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어 3월 9일 길직리(吉稷里) 예배당에서 길직교회 목사 이진형(李鎭亨)을 비롯하여 유봉진·유희철(劉熙哲)·장기흥(張基興)·조종환(趙鍾桓)·황도문 등 길직교회와 선두교회 소속 감리교 교인들이 모여 시위계획을 논의할 때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서울 시위에 참여했던 조종환이 만세시위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장윤백(張允伯)이 장날을 기해 시위를 벌이자는 제안을 하자 이에 모두 동의하고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어 3월 11일 황유부(黃有富)의 집에서 유경호(劉景鎬)·황도문·황도성(黃道成) 등이 만세시위 당일에 사용될 인쇄물을 제작하자, 3월 12~13일경 황도문으로부터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을 비판하고 독립의 필요성을 고취하는 내용이 담긴 「조선독립선언서(朝鮮獨立宣言書)」와 「국민회보(國民會報)」를 넘겨받아 강화 각 지역의 동리(洞里)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았다. 길상면만이 아니라 강화 전역에 인쇄물을 배부하는 동시에 각지의 교인들에게 독립운동에 찬동해야 한다는 취지의 선전 활동도 적극적으로 벌였다. 3월 15일에는 본인의 집으로 황도성·황윤실(黃允實)·황일남(黃日男) 등 여러 동지들을 불러 만세시위 당일인 3월 18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약속받았다. 또 3월 18일 강화 읍내에서 시작된 만세시위에서 사용된 태극기도 제작하여 동지들에게 제공하였다. 3월 18일 만세시위 당일 오후 2시 무렵, 장터에 모인 1만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시장에서 향교를 거쳐 군청으로 행진하면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오후 5시 무렵 시위운동 과정에서 붙잡힌 유희철·조기신(趙基信)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강화경찰서 앞에서 격렬히 항의할 때 시위대 앞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시위가 끝난 후 붙잡혀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제1심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 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중 180일 본형 산입)과 벌금 20원(미납할 시 20일 동안 노역장 유치)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1920년 3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제2심 재판에서 이른바 소요죄는 무죄가 인정되어 징역 8월(미결구류일수 중 180일 본형 산입)의 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0년 4월 28일 이른바 ‘은사령(恩赦令)’에 의해 석방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에 추서하였다. ⋮김영진(한역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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