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병룡
延秉龍1892. 6. 16 ~ 1919. 3. 3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괴산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92년 6월 16일 충북 괴산군(槐山郡) 증평면(曾坪面, 현 증평군 증평읍) 사곡리(射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일어난 괴산군 청안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제로부터 희생되었다. 청안면(淸安面)에서는 3월 19일 청안공립보통학교(淸安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 시도가 있었으나, 일제 경찰에 사전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그 후 이태갑(李泰甲)·장성원(張聖源)·신강면(辛康勉)·김수백(金壽伯)·(壽福)·박순옥(朴巡玉·明來)·함재원(咸在元) 등이 주도하여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이태갑, 김수백 등은 사전에 개최한 비밀모임에서 만세시위 거사일을 청안장터 장날인 3월 30일로 결정하였다. 당시 청안장터는 청안면을 포함하여 도안면(道安面)·증평면·청천면(靑川面) 등 괴산군 남부 4개면 사람들이 모이는 상당히 규모가 큰 장터였다. 이에 많은 주민들을 만세시위에 참여시킬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또한 만세시위 당일 배포할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서 등사에 각 지역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지역별로 조직책을 선정하였다. 신강면이 청천면의 일부 지역을, 이태갑이 증평면·도안면을, 장성원이 사리면(沙梨面) 일대를 담당하였다. 사전에 이태갑으로부터 연락 받은 지침대로 만세시위가 예정된 3월 30일 오전 청안장터로 출발하였다. 오후 1시경 장터 외곽에서 이태갑·김수백·장성원 등을 만나 이들로부터 태극기를 받아 옷 속에 감추고는 장터 안 쌀가게 앞에서 시위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오후 3시 30분경 독립선언서 낭독 후 이태갑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곧바로 호응하여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뛰어나와 다른 주민들과 함께 시위 대열을 형성하였다. 이어 김수백, 이태갑 등의 지휘에 따라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에 공감한 주민들이 계속 동참하면서 만세시위대의 규모는 2,0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청안주재소 일제 경찰들이 곧바로 출동하여 시위 해산을 강압했으나,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당시 시위대 앞 줄에 있던 유웅렬(劉雄烈) 등 7명을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이때 분노한 군중과 함께 연행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김수백·장성원·신강면·박순옥·이태갑·함재원 등의 지휘에 따라 청안주재소로 쫓아가 “어째서 죄없는 조선인을 너희가 체포하는가? 즉각 석방하라”고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시위대의 요구에 불응하고 해산을 강요하면서 오히려 김명진(金明鎭), 임수근(林水根) 등 더욱 많은 시위 참여자들을 붙잡았다. 계속되는 일제 경찰의 시위자 체포에 분노하고 있던 참에 주재소 안으로 쳐들어가자 하는 김수백의 외침과 함께 이태갑·박내명·장성원·함재원이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다른 주민들과 함께 주재소 습격에 참여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 나서 고함을 외치고 돌을 던지며 주재소로 진입하여 유리창 등 각종 기구 등을 파손시켰다. 다수 군중의 격렬한 시위에 위기감을 느낀 일제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사별 발포로 대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의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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