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주
吳錫柱1888. 12. 11 ~ 1952. 6. 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고흥군 만세운동
- · 순천노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888년 12월 11일 전라남도 고흥군(高興郡) 금산면(錦山面) 신평리(新平里)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오산석주(吳山錫柱)를 썼다. 1919년 4월 14일 고흥군 고흥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1938년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27일 평양신학교 입학을 목적으로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던 중,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목격하였다. 3월 3일 서울 대한문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습득하고 동지 목치숙(睦致淑)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만세시위 소식을 알린 후, 4월 14일 고흥면 읍내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이에 앞서 동지들과 만세시위 준비를 위한 역할을 분담하였는데, 금산면 지역 기독교 신도들의 규합을 담당하였으며, 조선독립고흥단(朝鮮獨立高興團) 명의로 선언서 작성 책임을 맡았다. 이때 한익수(韓翊洙)·황보익(黃保翌)·황재연(黃在淵) 등을 규합하였다. 4월 14일 만세운동 당일 고흥면 읍내 시장에서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려고 하였으나, 큰 비가 내려 중단하였다. 대신 조선독립고흥단 명의로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익명으로 고흥군청,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순천헌병분대 등에 송부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19년 6월 13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 해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목회 활동을 계속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38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그 해 2월 무렵 고흥군 금산면 오천교회에서 황기룡(黃起龍) 등 신도 40명에게 “여호와 이외의 신을 예배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는 것이니 신사참배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취지의 설교를 하였다. 같은 해 3월 본인이 담임 목사로 있는 도양면(道陽面) 관리(官里)의 관리중앙교회에서 신도 50명에게 위와 같은 이유로 신사참배를 거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고, 1942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0월, 같은 날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광복 이후 1947년 고흥군 기독교도연맹 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후보로 출마하여 전라남도 고흥갑에서 당선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차현지⋮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