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무
吳成武1898. 11. 18 ~ 1971. 9.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안동노우회
- · 고려공산청년회
- · 신흥청년동맹
- · 조선공산당
- · 신간회 안동지회
- · 경북청년연맹
- ·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日本勞動組合全國協議會)
- · 센슈일반노동조합(泉州一般勞動組合)
- · 간사이공명학원(關西共鳴學院)
포상 정보
- · 애족장(201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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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8) 1898년 11월 18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동부동(東部洞, 현 도산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의성면(義城面) 중리동(中里洞, 현 의성읍 중리리)이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산천성무(山川成武)로 고쳤다.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장성하여 1925년 『시대일보』, 『동아일보』, 1930년 『중외일보』, 『조선일보』 등 주로 안동지국의 취재 기자로 활동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드렸으며 경상북도와 일본 오사카(大阪)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1925년 10월 13일, 노동계급의 의식적 단결과 상호 부조를 통하여 당면 이익과 생활향상, 노동해방을 이끌고자 설립된 안동노우회(安東勞友會)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15일 열린 안동노우회 집행위원회에서 상무위원으로도 선출되어 재무부를 담당하였다. 이어 그해 11월 1일, 경상북도 안동 부근 7개 군의 한글 신문·잡지 지분국 기자단 조직인 기우단(記友團)의 발기인이 되어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해 11월 23일, 안동의 여러 사회단체가 참가한 도산서원(陶山書院) 철폐운동에 안동노우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하여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이는 1925년 10월, 도산서원의 재임(齋任)이자 지주인 이동흠(李東欽)이 소작료를 늦게 바쳤다는 이유로 소작인들을 서원에 감금하고 폭행을 한 사건이 발단이 된 것이었다. 1926년 안동민중운동자간친회에 참석했고, 그 해 3월경 예천군(醴泉郡) 하리면(下里面) 은풍출장소(殷豊出張所)에서 벌어진 안동 풍산소작인회의 소작쟁의 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혔다. 그 결과 4월 19일 이른바 소요죄, 업무방해 등으로 예심에 회부되었으나, 7월 6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상순, 하리면 우곡동(愚谷洞)에서 벌어진 소작인 간의 충돌 사건과 관련되어 상해죄로 고소당하기도 하였다. 이어 그 해 7월, 김남수(金南洙)의 권유로 공산주의 청년동맹 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였고, 8월 18일 경북안동청년회 집행위원회에서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27년 봄부터 이회승이 지도하는 야체이카(яче́йка, 공산당의 세포 조직)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그 해 5월 15일, 신흥청년동맹 정기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곧 이어 10월경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하고 안동야체이카에 소속되었다. 1928년 1월 6~8일 김천청년동맹회관(金泉靑年同盟會館)에서 경북청년운동자간담회(慶北靑年運動者懇談會)가 개최되었다. 그 결과 1월 8일, 경북청년연맹(慶北靑年聯盟)을 조직하기로 참가자들이 뜻이 모았기에 즉석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하였고 이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또 신간회(新幹會) 안동지회 활동에도 참가하였다. 같은 해 1월 18일, 신간회 안동지회 제2회 정기대회에서 간사 겸 대표회원에 선출되었고 1월 29일 제1회 간사회에서 정치문화부 상무간사로 선출되었다. 1929년 1월 20일 열린 안동지회 제2회 정기대회에서도 간사 겸 대표회원에 선출되었다. 이어서 열린 제1회 총무간사회에서는 문서검사위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8월 10일 열린 안동지회 임시대회에서 집행위원에 임명되었고, 8월 16일 개최된 제1회 집행위원회에서 상무집행위원을 맡게 되었다. 이어 13일 열린 제1회 상무위원회에서는 지회 도연합회의 발기 준비를 결의하였는데, 그 준비위원에 선출되었다. 1930년 2월 25일부터 안동경찰서에서 안동·예천·영주(榮州)·상주(尙州) 등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각 단체 간부를 일제 검거하기 시작했는데, 7월 28일 안동경찰서에 안동 신간지회 간부들과 함께 붙잡혔다. 결국 그 해 8월 18일, 안동 신간지회 조직 내에 공산당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이유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국되었다. 이어 1930년 11월 8일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고 그 해 12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가 이른바 ‘칙령(勅令) 제19조’에 의해 징역 6월로 변경되었다. 출옥 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1931년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日本勞動組合全國協議會) 토건(土建) 부문, 센슈일반노동조합(泉州一般勞動組合)에 가입하여 노동운동에 헌신하였다. 이어 그 해 12월 1일 간사이 공명학원(關西 共鳴學院)에서 담임교사로 근무하였다. 공명학원은 몇몇 한인촌이 연합하여 한국인 미취학 아동에 대한 보조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도 하였으며, 원장은 김상구(金相求)였다. 그러나 1932년 2월 1일 학생 3인이 일제 경찰에 붙잡힌 후 7월 25일 폐쇄되었다. 간사이공명학원에서 동료 교사 김재수(金在秀) 등과 함께 약 150명의 한국인 아동을 교육하였으며 노농사전, 자본주의 및 사회주의 관련서적을 구입하여 사상연구에 힘을 쏟았다. 또 아동들에게 항일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취시켰다.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에 가입하고 확대를 위해 전념을 기울여 활동하였으며 오사카 한국인 야학(夜學)을 통일하여 소년단 조직을 기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1937년 2월 19일, 일제 경찰에 다시 붙잡혔다. 그 해 4월 12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938년 7월 19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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