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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근

吳明根

1884 ~ 195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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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오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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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함흥(咸興)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함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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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함흥 기독교청년회
  • ·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2)

관련 사건

  • · 함흥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2) 함경남도 함흥군(咸興郡) 함흥면(咸興面) 하서리(荷西里) 출신이다. 1919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36세로 1884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한화실(韓化實)이다. 목면상(木棉商)을 경영하였고, 기독교인으로 신창리 교회의 집사이면서 함흥 기독교청년회의 서기를 맡고 있었다. 1919년 3월 3일 함흥군 함흥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고, 풀려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에서 활동하였다. 함흥지역의 만세운동은 1919년 2월 25일부터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하였다. 당시 원산 광석동 교회 전도사 이순영(李順榮)이 함흥 중하리 예배당에서 기독교인들을 모아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이에 그 자리에 참석한 한영호(韓泳鎬) 등 함흥지역 교인들과 함께 여기에 찬동하고 즉시 독립청원서 작성 용지에 서명 날인하였다. 이어 2월 28일에는 함흥읍 신창리 교회에서 북간도 용정의 영신학교 교사인 강봉우(姜鳳羽)가 이순영과 비슷한 요지의 연설과 함께 서울의 만세운동 준비에 맞추어 함흥에서도 이를 실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자리에서 참석했던 한영호·이근재(李根栽) 등과 함께 뜻을 같이하여 3월 3일 장날을 기하여 대중을 결속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만세운동의 준비를 위해 5~100원을 각출하고 한영호·이근재 등을 준비위원으로 하여 함흥에 거주하는 학생과 대중들이 참여하는 만세시위를 기획하였다. 1919년 3월 2일 이근재의 집에서 등사판을 사용하여 독립선언서 3천여 장을 인쇄하고 태극기 18개를 만들어 배포를 맡기면서 함흥의 여러 학교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였다. 만세시위 날인 3월 3일 정오, 함흥면 대화정통(大和町通) 부근에 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벌였고 이때 만세시위를 이끌며 적극 참여하였다. 이 만세시위는 일반 대중뿐 아니라 함흥지역의 각급 학교의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고 대거 참여함으로써 일제의 탄압에도 6일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제 경찰의 만세시위 주도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지면서 이근재 등 주도자 41명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4월 21일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같은 해 7월 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었지만 징역 8월을 받았다. 재차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그 해 9월 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한화실(韓化實)이라는 이명을 사용하면서, 1920년 9월 10일 임시정부 연통제(聯通制)의 함경남도 독판부(督辦府) 참사(參事)와 재무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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