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술
吳成述1884. 5. 15 ~ 1910. 9. 1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김태원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관련 사건
- · 후기의병(김태원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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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77) 1884년 5월 15일 전라남도 나주군(羅州郡) 삼가면(三加面) 죽산리(竹山里)에서 오영선(吳榮善)과 나주 임씨(羅州 林氏)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호는 죽파(竹坡), 휘는 인수(仁洙)이며, 이명은 한자를 달리한 오성술(吳聖述)이다. 당시 나주를 비롯한 향촌 사회에 널리 알려진 전형적인 향반 신분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여유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거의할 때 집안의 전답을 팔아 군자금으로 충당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특히 손이 귀한 집안의 외아들이기에 더욱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7세에 인근의 박산(博山) 마을 유생 후산(後山) 양상하(梁相夏)로부터 한문과 유학의 기초 지식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6세인 1900년에는 족숙(族叔)인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의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본격적으로 익혔다. 오준선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대표적인 제자 중의 한 명이었다. 바로 인근에서 살던 금재(錦齋) 이기손(李起巽) 등과 더불어 학문에 정진했는데, 이들은 훗날 모두 의병 전선에 뛰어들어 이름을 떨쳤다. 학문을 익히던 과정에서 동학농민운동이라는 거대한 변혁운동의 흐름을 어린 나이에 마주쳤다. 더욱이 삼도출장소 관내의 세동 마을 출신인 오권선(吳勸善 일명 中文)은 동학농민군의 대접주로 활약했다. 이 과정에서 나주오씨 문중은 상당한 피해를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충격을 감추지 못하였다. 얼마 후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최익현(崔益鉉)이 늙은 몸을 이끌고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으나, 곧이어 해산 소식이 들리자 크게 낙심하였다. 그럴수록 의병을 일으켜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가산을 팔아서 군자금으로 사용하며 뜻있는 사람들을 은밀히 찾아다니며 동조자를 물색하였다. 그러던 중 1907년 10월에 기삼연(奇參衍)을 중심으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가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따라 독자적인 의병봉기의 계획을 바꿔 나주 출신의 죽봉(竹峰) 김태원(金泰元) 등과 함께 의병장 기삼연의 휘하에 투신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강력한 반일 투쟁을 전개하여 호남의병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는데, 광주 전남의 각지에서 우국지사들이 모여들어 결성된 연합의진(聯合義陳)이었다.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 김태원 휘하에서 핵심 참모로 활약하였다. 이들은 전북 고창(高敞) 문수사(文殊寺)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으며, 고창읍성(高敞邑城)을 한때 점령한 바 있었다. 영광(靈光) 법성포(法聖浦)를 공격해서 주재소와 우편소는 물론 일본인 가옥들을 모두 불태웠다. 창고에 쌓여 있는 세곡미(稅穀米)를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일부는 군량미로 노획하였다. 이처럼 호남창의회맹소의 반일 투쟁이 격화하자 일제는 1908년 초부터 대대적인 탄압 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호남창의회맹소의 의병장 기삼연은 전남 담양(潭陽)의 금성산성(金城山城)에서 기습을 받아 전북 순창(淳昌)에서 체포되어 1908년 2월 3일 광주(光州)에서 희생되었다. 김태원 역시 그해 4월 25일 광주의 어등산(魚登山) 전투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마침 전북의 이석용(李錫庸) 의진에서 활동하다가 남하한 전해산(全海山)과 만나 의기투합하였다. 전해산· 조경환(曺京煥) 등과 함께 광주의 용진산(龍珍山)에서 김태원 의병부대의 흩어진 의병들을 불러 모아 새로운 부대를 결성하였다. 처음에는 조경환을 의병장에 추대하여 단일 부대로 활동하다가 의병들을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각자 독립적인 부대를 이끌었다. 도통장 오상렬(吳相烈), 선봉장 김성현(金聖鉉), 중군장 오원규(吳元圭), 도포장 김봉선(金奉先), 호군장 이종석(李鍾晳), 후군장 양치홍(梁治洪)·김재홍(金在洪), 운량장 김목사리, 서기 겸 모사 오재두(吳在斗) 등으로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도통장 오상렬과 도포장 김봉선의 지휘 아래 납과 구리를 구하여 탄환을 제작하였고, 중군장 오원규의 지도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흔히 ‘오참봉부대’ 혹은 ‘오참봉의병’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먼저 친일 주구배의 처단에 앞장섰다. 당시 친일 밀정들이 의병의 동정을 일제 군경에 알려줌으로써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밀정노릇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재물을 약탈하여 원성을 샀던 황도현(黃道玄)·손홍규(孫洪圭)·이운화(李云化) 등을 처단하였다. 다음으로 곡창지대인 전남에 침투하여 경제 침탈에 앞장선 일본인 농장주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한국 농민의 토지를 빼앗아 농장을 설치하고서 미곡 수탈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1908년 1월 10일 밤 20여 명의 부하 의병들을 거느리고 광주군 마지면 반촌에 있는 일본인 지주 좌구간시삼랑(佐久間矢三郞)의 농장을 습격하였다. 이때 의병들은 농장 지배인 제등일(齋藤一)의 집에 총격을 가하여 그의 처와 아들, 그리고 딸 등을 처단하였다. 이어 집안을 수색하여 총기·도검 등 무기류를 노획하고, 농장 가옥과 곡물·가축 등을 불태웠다. 이듬해 1월 31일 수십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광주군 대지면(大枝面) 곡촌(曲村)에 있는 일본인 지주 삼십내(森十內)의 농장을 습격하였다. 이때 의병들은 농장 가옥과 창고를 불질러버리고 곡물 등은 노획했는데, 2,500여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한국의 농촌에 침투한 일본인 지주들에 대한 응징이었다. 일제 군경과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음은 물론이다. 1908년 후반 전해산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나주 석문산(石門山) 전투와 대명동(大明洞)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하였다. 1909년 음력 설날에도 나주 고막원(古幕院) 헌병분파소를 공격하여 2명의 헌병 보조원을 사살하고 다수의 무기류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3월 8일 남평(南平) 거성동(巨聲洞)에서 심남일(沈南一) 의병부대와 합동작전을 벌여 다수의 일본군을 처단하였다. 이들의 항일투쟁이 갈수록 거세어지자, 일제 군경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에 일제는 임시한국파견대라는 대규모의 부대를 투입하여 전남지역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실시했다.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그것이다. 일제의 군경은 전북 부안(扶安)에서 임실(任實)·남원(南原)·하동(河東) 이서지역(以西地域)을 포위하여 호남 의병 수천 명이 붙잡히고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당시 상황을, “그물치듯 포위하고서 촌락을 샅샅이 수색하고 집집마다 조사하여 조금만 의심나면 즉시 살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09년 8월 영산포(榮山浦) 헌병대에 의해 추적을 받았다. 나주 문평(文平)의 용문산(用文山)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았다. 1909년 11월 30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내란 등으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옥고를 겪던 중, 이른바 살인죄와 방화죄가 죄목으로 추가되어 이듬해 6월 17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1910년 8월 9일 교수형이 확정되었고, 같은 해 9월 15일 대구감옥에서 형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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