呂圭穆
圭穆1888. 4. 25 ~ 1918. 11. 1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이석용 의병부대
- · 동맹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후기의병(이석용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88년 4월 25일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상동면(上東面) 대운치(大雲峙, 현 성수면 대왕리)에서 태어났다. 직업은 의사(醫師)였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이명으로는 여규호(呂圭浩)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후기의병 주요 인물이자 위국위민(爲國爲民)의 위정척사적 입장에 서서 전북 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임실 지역의 농촌 유생 출신 이석용(李錫庸)과 함께하였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과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은 이석용은 고종의 강제 퇴위를 비롯하여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자 1907년 8월 29일부터 총포와 철환을 수집하고 사방에 격문을 전하여 의병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음)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 용암(龍巖)에 제단을 만들고 하느님께 제사를 올린 이석용은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표방하며 의병을 일으켰는데, 김운서(金雲瑞)·김성학(金成學)과 함께 중군장이 되어 의병활동에 나셨다. 이 때 군사를 일으킨 의병 규모에 대해 이석용은 『창의일록(倡義日錄)』에 직접 1,000여 명으로 서술하였으나, 전주공판기록(全州公判記錄)의 문답에서는 3백 명이라고 답하여 서로 차이가 난다. 병사들은 대체로 농민들로 구성되었다. 이석용 부대 중군에 속하여 임실·진안(鎭安)·장수(長水)·운봉(雲峯, 현 남원시 운봉읍)·용담(龍潭, 현 진안군 용담면)·남원(南原) 등지의 산간지대에 주둔하며, 일본군과 친일 한국인, 특히 일진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구체적으로는 1908년 5월 20일 장수군(長水郡) 내신면(內信面) 오량전(五良田) 이사중(李思仲)의 가택에서 엽전 50냥, 마포 2필을 확보하였고, 같은 해 6월 5일에는 장수군 같은면 매암리(梅巖里) 김병운(金炳云)의 가택에서 엽전 30냥을 거두었다. 그 해 8월 20일에는 진안군 마령면(馬嶺面) 평지동(平地洞, 현 평지리) 정광서(鄭光西) 가택에서 엽전 50냥을, 같은 해 11월 15일과 12월 5일에는 장수군(長水郡) 내 지사방면(地砂房面) 관기동(館基洞, 현 임실군 지사면 관기리) 박씨에게 각각 엽전 30냥과 엽전 30냥과 마포 2필을 확보하였다. 또한 1908년 12월 4일 임실군 신평면(新平面) 마호리(馬湖里) 강경호(康敬浩)에게 조(租) 27석에 상당하는 수표 1통을, 같은 달 12일 임실군 하북면(下北面) 구암리(九巖里, 현 관촌면 운수리) 최경보(崔京甫)의 가택에서 조 8석에 상당하는 수표 1통을 접수하였고, 같은 달 15일 임실군 상동면(上東面, 현 성수면) 왕방리(旺方里) 박학선(朴學仙)에게 조 5석 17두(斗)에 해당하는 수표 1통을 확보하였다. 이로 인해 1909년 3월 5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교수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4월 27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 해 5월 21일 대심원에서도 기각되었다. 대구형무소 수감 중에 간수의 칼을 빼앗아 간수 3명을 처단하기도 하였다. 이후 1918년 11월 14일 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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