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혁
吳周爀1876. 10. 16 ~ 1934. 9. 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성명회
- · 대한국민의회
- · 대한북로독군부
- · 대한애국청년혈성단
포상 정보
- · 애국장(200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6) 1876년 10월 16일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이중면(利中面) 하전리(荷田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오주혁(吳周赫)과 오주의(吳周易)를 사용하였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관리가 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였다. 상경 후 중서중(中署中) 차동(茶洞)에서 거주하면서 국권이 피탈되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대하여 항거하고자 이승재(李昇宰) 김두성(金斗星) 등과 같이 뜻을 같이하고 상소운동(上疏運動)을 전개하였다. 한일의정서에 대한 진상을 밝히고자 문장을 기초하였고, 그 중 등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전주 사(前主事)로 유선준·이희주 등과 같이 일진회(一進會) 선언서에 대하여 공함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운동의 어려움을 인지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이범윤(李範允)·윤인석(柳麟錫) 등이 조직한 성명회(聲明會)에 가입하여 교육 사업을 펼치는 등 교육 발달, 민지(民知) 개발을 통해 독립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또 『해조신문』을 『대동공보』로 이름을 바꾼 뒤 회장직을 맡았다. 그러던 중 1912년 체포되어 경기도 대포의도(大布衣島)에 거주 제한 조치를 당하였다. 그 후 중국의 훈춘(琿春)과 노령을 오가며 교육 사업과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는데, 훈춘에서는 황병길(黃丙吉), 블라디보스톡에서는 이동휘(李東輝)·김립(金立)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해외의 한인사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노령에 있는 한국인들은 기존의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를 1919년 3월 17일에 대한국민의회로 개편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사법·행정·군사 등 구분하고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 당시 이에 가입하여 박군천(朴君天) 등과 같이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월 17일 훈춘의 둥닝현(東寧縣) 삼차구(三岔口)에서는 4천여 명의 사람들을 동원되어 독립선언 발표식이 개최되었다. 이를 주최한 진학신(秦學新)은 결사대를 모집하고 노령의 독립군과 연합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당시 훈춘현 태평구(太平溝)에 거주하면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 외 훈춘에서의 비밀조직 해도호(海島號)의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겉보기에는 한인 잡화점으로 위장하였으며, 주인은 황중현(黃仲鉉)인데 노령의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이종호의 부하로서 정보원으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1920년 초에 들어서면서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연합과 통합의 소리가 높아졌고, 1920년 5월 3일 허룽현(和龍縣) 봉오동에서는 대한국민회·북로군정서·신민회 등 6개 독립운동 단체 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개최하였다. 5월 하순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까지 가담하게 되면서 대한북로독군부라는 무장투쟁 단체가 조직되었다. 부장은 최진동(崔振東)이고, 북로제1군사령부 부장은 홍범도였다. 당시 대한북로독군부에 가입하여 홍범도 산하 제1군사령부에서 허동규(許東奎)·최우익(崔祐翼)·나중소(羅中昭) 등과 같이 참모로 활동하였다. 1922년에는 대한애국청년혈성단(大韓愛國靑年血誠團)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920년 말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오운현(烏雲縣)에서 조직된 이 단체는 ‘경신참변’ 이후 연해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만주로 돌아와서 활동한 단체로, 청년들을 규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행적은 자료의 한계로 확인할 수 없으나, 1934년 9월 1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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