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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서

吳祥瑞

미상 ~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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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오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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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장단(長湍)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장단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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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북로군정서
  • · 대한독립군단
  • · 신민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청산리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출신이다. 자료의 한계로 출생일자는 확인할 수 없다. 호는 청호(淸胡)이며,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오상세(吳尙世·吳相世·吳詳世)를 사용하였다. 대종교 교인이었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19년 8월 왕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에 위치한 북로군정서사관연성소(北路軍政署士官鍊成所) 교관에 선임되었다. 1920년 7월부터 1921년 4월 사이 북로군정서사관연성소 제2학도대장(서리)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9월 9일 북로군정서사관연성소 제1회 졸업생들로 보병 1개 대대가 편성되었다. 이때 김규식(金圭植)·홍충희(洪忠熹)·김찬수(金燦洙)와 함께 중대장에 선임되었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직전 개최된 연합작전회의에서 간도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부대들은 연합하여 3개 연대로 편성되었다. 북로군정서로 조직된 제2연대의 제4중대장에 선임되었다.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여 1920년 10월 22일 허룽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천수동(泉水洞)에서 중대원 약 80명과 함께 일본군 기마중대를 기습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해 12월 북로군정서 사령부 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새로운 차원의 독립운동방략을 모색하기 위해 1923년 1월 상하이(上海)에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4월 8일 이범윤(李範允)·이범석(李範錫)·김좌진(金佐鎭)·최세진(崔世鎭)·김규식·조성환(曺成煥) 등 33명과 함께 개조파의 입장을 표명한 「재만유지(在滿有志)의 경고서(警告書)」를 국민대표회의에 보냈다. 1923년 9월 둥닝현(東寧縣) 소수분(小綏芬)에 위치한 군사강습소에서 훈육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강습생은 40~50명 규모였다. 같은 시기 북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부대들의 통합을 위해 소수분에서 이범윤과 김좌진·김규식·최진동(崔振東)·현천묵(玄天黙)·강국모(姜國模) 등이 모여 군사연합회의준비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이종필(李宗弼)·송세환(宋世煥)·남극(南極)·백종렬(白鍾烈)과 함께 대표심사위원부원에 선임되었다. 대표심사위원부는 항일운동 각 단체에서 통합을 위해 파견된 대표자의 자격을 심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1925년 3월 15일 닝안(寧安)에서 개최된 신민부(新民府) 창립총회에서 제2대대장에 선임되었다. 10월에는 신민부 삼분구지방(三岔口地方) 총판(總辦)으로 활동하였다. 지방총판은 거주 한인(韓人)을 대상으로 의무금과 교육비 모집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 교관으로도 활동하였다. 성동사관학교는 신민부에서 무링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설립한 독립군을 양성하는 학교이다. 성동사관학교에서는 1년에 2기(2期)의 속성 군사 교육을 실시하였다. 1926년 4월 18일 목단강(牧丹江)에서 신민부 제1대대장 백종렬 등과 함께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군사부를 둥닝으로 옮기고 강습소를 설치하여 보통교육과 군사훈련을 시킬 것, 중동철도(中東鐵道) 연선지방(沿線地方)에는 민사부(民事部)만을 두어 지방농민의 지도와 보호를 담당할 것을 결의하였다. 6월에는 둥닝현에서 신민부 별동대장(別動隊長)으로 활동하였다. 별동대는 노령(露領)으로부터 이동해 온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으로 조직되었다. 또한 성동사관학교 교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27년 7월 신민부 임시총회에서 보안 제2대대장에 선임되었다. 1927년 2월에 일제경찰과 중국군 1개 중대의 습격으로 신민부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인 김혁과 경리부 위원장인 유정근, 본부에서 활동했던 김윤희(金允熙)·박경순(朴敬淳)·한경춘(韓慶春)·남중희(南重熙)·이정화(李正和)·남극 등이 체포되었다. 신민부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12월 25일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총회를 개최하였다. 총회에서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인 김좌진은 보다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민사부위원장인 최호(崔灝)는 우선 교육과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민부는 군정파와 민정파로 양분되었다. 양분된 상황에서 보안 제2대대장으로서 군정파를 지지하였다. 1930년 7월 한족총연합회와 생육사(生育社) 등을 모체로 하여 북만주(北滿洲) 웨이허현(葦河縣)에서 한국독립당이 조직되었다. 한국독립당에서는 ‘만주사변’ 이후 중국군과 공동작전을 위한 군사대오로서 1931년 11월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였는데, 1932년 한국독립군 제2대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둥닝현 삼분구에서 만주구국총사령관 이두(李杜)의 지원을 받아 1932년 대한구국의용대를 결성하였다. 1936년에 대한혁명당이라 개칭하고 중앙위원에 취임하여 길림성자위구군(吉林省自衛軍) 대장으로 활동하던 중 1937년경 지린성(吉林省) 밀산(密山)에서 병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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