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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承萬

承萬

1909. 10. 4 ~ 1990.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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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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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평(楊平)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양평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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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신창학교
  • · 한국독립군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9년 10월 4일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용문면(龍門面) 광탄리(廣灘里)에서 양건석(梁健錫)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활동 당시에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아청현(阿城縣) 오구(五區) 대석하(大石河)에 거주하였다.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호는 옥충(玉忠)이다. 1919년 4월 양평군 지평(砥平)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2년 3월에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 4월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5년에 졸업하였다. 부친은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용문면사무소 습격을 주도한 인물로 일제의 감시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이에 1926년 2월 부친이 중국으로 명명을 결심하자 중국 헤이룽장성 연수현(延壽縣) 각가대둔(閣家大屯)으로 가족들과 함께 이주하였다. 1927년 2월 신숙(申肅)이 설립한 빈주현(賓州縣) 송봉산촌(松峰山村) 소재 신창학교(新彰學校)의 교사로 활동하며, 한인 청소년들의 민족교육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학교가 폐교되자 아청현에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에 입대하여 상사(上士)로 활동하였다. 이후 한국독립군이 길림민중자위군(吉林民衆自衛軍)과 한중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을 전개하자 제3군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한국독립군은 김좌진(金佐鎭)이 암살당한 후 1930년 7월 지린성 위하현(葦河縣)에서 민족진영의 독립운동세력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결성되자 그 당군(黨軍)의 형태로 결성된 조직이었으며, 총사령 지청천(池靑天)을 비롯하여 부사령 김창환(金昌煥), 참모 이규채(李圭彩)·신숙(申肅), 대대장 오광선(吳光善), 중대장 최악(崔岳)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중국의 이두(李杜)·정초(丁超) 등이 이끄는 길림민중자위군을 비롯하여 고봉림(考鳳林)·오의성(吳義成)부대 등과 연합한 연합작전의 형태로 강력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서란현전투(舒蘭縣戰鬪)·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경박호전투(鏡泊湖戰鬪)·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 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입대 후 주로 오광선의 휘하에서 활동하며, 한인들에 대한 선무공작과 신병 소모에 주력하는 한편, 목란현(木蘭縣)·연수현 등지에서는 일만군(日滿軍)과 조우하여 전투를 전개하였다. 특히 1932년 9월과 11월 고봉림부대와 연합하여 전개한 제1·2차 쌍성회전(雙城會戰)과 1933년 2월의 사화천(四和川)전투에서는 크게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오광선 등 한국독립군 주력이 김구(金九)로부터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인특별반(韓人特別班) 운영에 대한 제의를 받고 중국 관내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고 더 이상의 항일무장투쟁이 어려워지자 가족의 안전을 위해 같은 해 8월 하얼빈(哈爾賓)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주로 중국인이 운영하는 학사에서 교원으로 활동하거나 만상전기조합(滿商電氣組合)의 임시 사무원으로 취업하여 생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한 후에는 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동지들과 함께 한국대동민주당(韓國大同民主黨)을 결성하고 외교부장(外交部長)으로 활동하며 교민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노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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