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89. 11. 15 ~ 193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광복군총영
- · 대한통의부
- · 정의부
- · 국민부
포상 정보
- · 애국장(201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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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3) 1889년 11월 1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안홍(安弘·安洪)을 사용하였다. 자료의 한계로 만주로 이주한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1922년 무렵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의 모험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광복군총영은 1920년 초 서간도 콴뎬현(寬甸縣)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속기관으로 성립된 광복군(光復軍) 소속의 특수부대였다. 오동진(吳東振)이 총영장이 되어 이끈 광복군총영은 오직 항일 군사 활동만 수행하는 기관이었다. 1922년 봄 남만주(南滿洲)지역의 한국 독립운동단체들은 통합운동을 전개하였다. 남만주의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1920년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참변(間島慘變))’에 의해 폐허가 된 독립군 근거지와 한인사회를 재건하고, 보다 효율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한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 같은 판단에 의해 1922년 봄 남만통일회가 결성되고, 통일회의 노력으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통군부와 남만지역 독립운동계 지도자들은 그 해 여름까지 더욱 노력하여 1922년 8월 23일 환런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 현 향양(响陽))에서 남만한족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8월 30일까지 7일간 개최되어 남만지역의 한국 독립운동 단체 17개가 통합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성립되었다. 이 통의부가 성립되기 까지 광복군총영의 대표로 참여하여 통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총장에 김동삼(金東三), 부총장에 채상덕(蔡相德)이 통의부의 최고 지휘부에 선임되었고, 그 아래 민사·교섭·군사·법무·재무·학무·권업·교통·참모 등의 행정부서가 편성되었다. 그리고 항일무장활동을 수행할 통의부 의용군이 조직되었다. 의용군 사령관은 김창환(金昌煥)이었고, 제1중대부터 5중대까지 5개 중대와 유격중대 및 헌병대, 그리고 특수부대인 호위대가 있었다. 1923년부터 이 호위대의 대장으로 활동하였다. 통의부 구성원들은 통합에 합의할 당시 각자의 이념이나 노선은 포기하고 오직 조국 광복 달성과 이주 한인의 생계를 도모하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구성원 간에 처음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이념적 갈등이 표출되었다. 그 결과 1923년 초 복벽주의(復辟主義)계의 전덕원(全德元)·채상덕 등이 의군부(義軍府)라는 독립군단(獨立軍團)을 성립시켜 이탈하였다. 그리고 약 1년 후인 1924년 상반기에는 노선에 갈등이 생겨 제1중대장인 채찬(蔡燦)과 김원상(金元常) 등이 임시정부와 협의한 뒤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기관인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하였다. 참의부는 항일무장투쟁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지휘관들이 통의부 의용군 제 1·2·3 중대와 유격대 및 독립소대가 이탈시켜 만든 독립군단이었다. 이 같이 대규모의 의용군이 빠져 나가자 통의부내 항일무장세력은 상당히 약화되고 말았다. 이를 만회하고자 1924년 5월 2일 현정경(玄正卿)·이웅해(李雄海) 등 7명의 통의부 주요 간부들과 콴뎬현 장음자(長陰子)에 모여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향후 보다 활발한 항일활동을 펼친다는 다짐 하에 ① 일제의 관헌이 된 한인을 매수해 내정 탐지 ② 경성부에 통의부 통신기관 설치해 일제 관헌의 행동을 탐사 보고 ③ 서울에 결사(決死)청년 약 40명 모집해 주둔시킴 ④ 친일파들을 잡아들여 정보 수집, 등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통의부 의용군의 항일투쟁력을 높이려는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6월 김명봉(金明鳳)이 이끄는 제5중대가 또 다시 참의부로 합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잔류파들은 백방으로 5중대의 이탈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5중대가 이탈하고자 한 뜻을 굽히지 않자 양측 간에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1924년 7월 2일 중대장 김명봉이 잔류파의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김명봉이 사망하자 5중대의 조직을 물려받아 후임 중대장이 되었다. 중대의 근거지를 싱징현(興京縣, 현 신빈현(新賓縣)) 왕청문(旺淸門)에 두고 30여 명의 독립군들을 이끌고 항일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념과 노선의 갈등에 의해 의군부와 참의부로 상당한 세력이 빠져가자 통의부의 지휘부와 독립군 통합체를 바라던 재만 독립운동계는 또 다시 통합운동을 펼쳤다. 1924년 7월 10일 전만통일회의주비발기회(全滿統一會議籌備發起會)를 개최해 통합운동을 시작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그 해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켰다. 정의부에는 통의부를 비롯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광정단(光正團)·의성단(義成團)·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잡륜자치회(卡倫自治會)·고본계(固本契) 등 남만주에 근거지를 가진 8개 단체가 참여하였다. 정의부는 하얼빈–액목(額穆)-북간도(北間島)를 동서로 이어 그 이남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관할하는 자치활동을 펼치고, 의용군을 편성해 독립전쟁을 수행할 목표를 세웠다. 또한 자치활동을 펼치기 위해 입법·사법·행정의 3권 분립에 입각한 기구를 만들고, 지청천(池靑天)을 사령관으로 한 의용군을 편성하였다. 이 같이 새롭게 성립된 정의부 의용군 제5중대장에 임명되었다. 주둔지는 통의부 시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싱징현 왕청문 이었으며, 휘하에 3개 소대가 있었는데, 제1소대장은 양세봉(梁世奉), 제2소대장은 김기주(金基冑), 제3소대장은 김신택(金信澤)이 임명되었다. 중대의 정확한 인원은 확인할 수 없으나 90정의 소총과 8,500발의 탄약을 보유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봤을 때 100명 전후의 독립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의부가 성립되고 얼마 되지 않은 1925년 초에 편성된 이 의용군 체제는 통의부·서로군정서·광정단·의성단 등의 독립군을 일시에 합한 것이어서 체계적이지 못하였다. 따라서 1925년 9월경 의용군의 체제를 5개의 중대와 헌병대로 재조정해 편성하였다. 이 재조정된 편제에서는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부하 독립군을 이끌고 퉁화현(通化縣) 흥묘자(興廟子)에 주둔하였다. 1925년 말경에는 헌병대장으로 직책을 바꾸어 활동하였다. 정의부는 채찬·김원상 등이 참의부를 만들어 통의부를 이탈했다는 이유 때문에 성립 초부터 임시정부와는 상당히 좋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측은 정의부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 재만 독립운동계에서 임시정부가 제구실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1925년 5월 이유필(李裕弼)과 오영선(吳永善) 두 사람을 만주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정의부 행정 기구인 중앙행정위원회 인사들을 만나 임시정부 참여를 권유하였다. 참여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새로운 지도 체제인 국무령제의 국무령을 정의부에서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중앙행정위원회는 정의부의 직책은 맡지 않았지만 최고지도자격인 이상룡(李相龍)을 국무령으로 추대하기로 파견원들과 합의하였다. 그런데 입법기관인 중앙의회의 의원들은 행정위원회의 결정에 반대하였다. 결국 양측 간에 갈등이 생기게 되어 의회는 행정위원회를 불신임하는 결의를 하고, 행정위원회는 의회를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정의부내의 양대 조직이 와해되자 이를 타결하고자 1926년 1월 24일 정의부 의용군 지휘부와 관할 각 지방의 대표들이 힘을 합해 군민대표회(軍民代表會)를 결성하였다. 이 군민대표회에 헌병대 대표로 참여하였다. 군민대표회는 1월 26일 난국을 수습하기 위한 성명서와 정의부 헌장을 개정해 발표하였다. 군민 대표들은 중요한 일을 공론화하지 않고, 행정위원회 의원들만이 임시정부 파견원들과 약속한 사실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행정위원회 기구를 축소하였다. 그리고 향후 정의부는 자치 활동은 이어 가되 항일무장활동을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한다고 발표하였다. 군민대표회의 활동에 의해 새로 중앙행정위원회가 구성되고 중앙의회의 의원들이 선출되었다. 또 항일무장활동을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 결정됨에 따라 의용군의 진용도 개편되었다. 의용군 전체가 항일의 최전선에 선다는 지침 하에 다른 특수부대는 전혀 만들지 않고, 제1중대부터 6중대까지 6개 중대만 병렬식으로 편제하였다. 이 중 류허현(柳河縣)에 근거지를 둔 제6중대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9월 1일 제2소대장 김창림(金昌林)에게 유격대를 구성하도록 해, 밀정으로 판명된 퉁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에 거주하는 신한철(申漢哲)과 신영선(申永宣)을 처단하도록 명령하였다. 5명으로 구성된 김창림 유격대는 먼저 신한철의 집을 습격했으나 순간적으로 도주해 당사자는 처단하지 못하고, 밀정들에게 경고하는 의미에서 그 가족들을 처단하였다. 신한철의 연락을 받은 신영선도 도주하여 밀정 당사자들을 처단하는 일은 실패하고 말았다. 총소리를 듣고 달려 온 중국 경찰대에 소대장 김창림과 3명의 대원이 체포되었다. 이들 체포된 대원들은 일제의 영사관 경찰대에 넘겨졌다. 1926년말 오동진(吳東振)이 사령관에 임명되면서 중대장들이 바뀌고 근거지가 변경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계속 제6중대의 중대장직을 수행하였으며, 류허현에만 구축되었던 근거지를 헤이룽(海龍)과 후이난현(輝南縣)까지 넓혀 병력을 배치하였다. 해를 넘겨 1927년 2월에는 제6중대의 중대장직을 장세용(張世湧)에게 넘기고 이태형(李泰馨)과 함께 사령부의 부관에 임명되었다. 부관은 사령관 오동진을 보필하며 의용군 전체를 관장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직책이었다. 사령관 오동진은 군사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요원을 계속 보충하였다. 그리고 체제를 굳건하게 하기 위해 강력한 규율을 만들어 현역병을 단속하고, 그 힘을 결집시켜 활발한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의용군의 힘을 증진시켜 가던 오동진 사령관이 1927년 12월 19일 창춘(長春)에서 일제 경찰대에 체포되자 뒤를 이어 지청천이 의용군사령관이 되었다. 사령관이 바뀌었으나 이번에는 오세진(吳世振)과 부관의 업무를 맡아 정의부의 독립전쟁을 이끌어 갔다. 1920년대 후반, 만주 독립운동계는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였다. 남북만주를 가릴 것 없이 재만 독립운동계를 하나로 통합하자는 운동이었다. 이에 따라 1927년 4월 15일부터 18일까지 4일간 지린현(吉林縣) 신안둔(新安屯)의 길흥학교(吉興學校)에서 민족유일당 설립을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를 시작으로 남북만주의 민족유일당 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각 단체 또는 개인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방법론 문제, 그 시기 재만독립운동계에서 큰 역할을 하는 정의부·참의부 및 신민부(新民府)를 하나로 만드는 3부 통합운동 등 여러 가지 일들이 추진되었다. 이 같이 민족유일당을 만들기 위한 많은 사업이 추진되었으나 재만 독립운동계는 하나가 되지못하였다. 1928년과 29년 북만주를 하나로 만든 혁신의회(革新議會)와 남만주를 하나로 한 국민부(國民府)가 만들어 졌다. 그리고 혁신의회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한국독립군을, 국민부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과 조선혁명군을 설립해 이념과 노선을 당에서 만들고, 그에 대한 실천은 군에서 행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국민부가 성립되자 그 소속군인 조선혁명군 제4대 대장에 임명되기도 했지만, 1929년 5월 지방계엄사령장에 임명되어 친일단체와 친일파들을 척결하는데 앞장섰다. 5월 29일 사령장 명의로 “일제가 만주와 몽고를 침략하려 혈안이 되어있는 이때 선민부(鮮民府)·조선인회·조선인옹호단·동아보민회(東亞保民會) 같은 친일 집단이 일제에 협력해 한국 독립운동자들을 탄압하게 하고 있다. 이런 집단에 우리 한인동포들은 가담하지 말 것이며, 그들과 부화뇌동하는 자들은 가차없이 처벌하겠다”는 내용의 계엄령을 발표하였다. 계엄령을 내린 후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이들 친일파 처단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이후 국민부에서 1929년 9월에 외무부를 총괄하는 집행위원, 11월에는 중앙집행부의 중앙검리(中央檢理)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다 1929년 12월 20일 조선혁명당이 결성되자 당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조선혁명당은 23명의 집행위원을 두고 그 아래 조직·경제·민중·교양·국제 등의 부서와 군사·자치·선전위원회 등 위원회를 편성해 당을 운영하였다. 중앙집행위원은 되었지만 당의 집행부서에는 들어가지 않고, 또 다시 항일무장활동을 실천할 조선혁명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조선혁명군은 제1대부터 10대까지 10개의 대(隊)를 병렬식으로 편성했는데 제9대의 대장에 임명되어 지린과 화이더현(懷德縣)지방에 부하 독립군을 배치해 무장활동을 펼쳤다. 1930년대 초까지 조선혁명군 지휘부의 일원이 되어 이 같이 활동하다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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